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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뮌헨, 악의 모든 시작을 지켜본 도시(1)

나치의 비어홀 폭동(1923년)

by 이준호

“역사는 이 날을 배신의 날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위대한 민족적 의지를 보여준 날로 기억할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폭동 실패 후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


“독일의 한갓 천당”. 뮌헨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서 어릴 적 보았던 여행 책자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책자의 설명에 따르면 뮌헨은 엄격하고 딱딱한 독일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독일 도시였는데 그 이유는 이곳의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른 아침에 북부 독일의 숙소를 출발해서 아우토반을 6 시간 이상 달렸다. 한참을 밟고 달리다 보니 점심때가 좀 지나서 뮌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의 중심지는 마리엔플라츠(Marienplatz) 광장에 있는 시청사(Rathaus) 주변이었는데 고풍스러운 건물 속에 화려한 인형들이 회전하며 나오는 시계와 장식물들이 시선을 끌었다. 광장 주변에는 많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거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방에 거리의 연주가들이나 마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보고 듣는 재미들이 쏠쏠했다. 무엇보다도 북부 독일보다 날씨가 좋았다. 또한 ‘천당’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나만의 선입견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유럽 또는 독일의 다른 도시들 중에서도 뮌헨은 확실히 밝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첫 번째 목적지인 피나코텍(Pinakothek)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알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과 노이에 피나코텍(Neue Pinakothek)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주로 19 세기와 20 세기 유럽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던 노이에 피나코텍으로 갔다. 르누아르, 드가, 세잔느 그리고 마네와 같은 여러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고흐와 고갱의 작품이 있었고 추상화가인 클레, 코코슈카 그리고 클림트의 작품들도 있었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였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수많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견학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화가 중에 스페인 화가 ‘호안 미로(Joan Miro)’ 작품도 있었는데 단순한 원색 배합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들어간 그림들이 특이했고 무척 인상에 남았다. 관람을 마치고 마침 입구에서는 화가들의 작품 사진을 판매했는데 그중 미로의 것을 구입했다(한국에 와서 사진을 액자에 맞췄고 지금도 집 한 구석에 잘 걸려 있다).

세계 최대의 비어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

다음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길에서 본 뮌헨은 너무나 깔끔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세련된 옷차림에서 이 ‘바이에른 도시’의 부유함과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마침내 목적지인 세계 최대의 비어홀,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에서 맥주집에 걸려있던 사진에서나 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입장을 하니 마치 군대 막사와 같은 커다란 아치형 천장에 길게 뻗은 탁자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는 손님들이 절반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 중앙에는 바이에른 전통가죽 반바지에 멜빵을 맨 사람들이 폴카 풍의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노래들은 아마도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때 연주하는 곡들일 것이다. 드디어 종업원이 커다란 맥주잔을 여러 개 들고 한 번에 가지고 왔다. 두툼한 맥주잔이 좀 무거웠지만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순간 잔의 무게 따위는 잊어버렸다. 일단 맥주가 진하고 맛있었다! 라거(Lager)와 바이스 비어(Weissbier)를 마셨고 이후 알코올 도수가 조금 더 높은 복 비어(Bockbier)로 넘어갔다. 진한 맥주에 더해 안주로 나온 독일식 돼지족발인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는 바삭했고 양도 푸짐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맥주집에서 독일식 돼지족발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술이 끊임없이 들어갔다(그날은 결국 평소 주량을 넘기고 말았다). 흥겨운 음악 속에 맥주와 음식이 어우러지며 실내의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여러 테이블에서 자리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 기분 좋게 리듬을 맞추기도 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며 독일인들이 뮌헨을 ‘독일의 한갓 천당’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도시가 항상 이렇게 즐겁거나 파라다이스와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방문할 때부터 약 70여 년 전, 이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불과 10 여분 떨어진 다른 비어홀에서는 독일을 뒤흔든 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당일 내에 빠르게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 사건의 ‘중심인물’과 ‘그 단체’는 유럽과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그렇게 인류사의 ‘거악(巨惡)’으로 등극했다.


패배한 제국

연합군에 항복 중인 독일 대표를 묘사한 프랑스의 그림 엽서(가운데 검은색 코트가 독일 대표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우측에서 두번째 서있는 이가 프랑스 대표인 포슈 원수이다)

1918 년 11 월 7 일 독일 정치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를 대표로 하는 일단의 독일인들이 벨기에의 독일군 점령 지역을 통해 프랑스 영토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전에 약속된 대로 프랑스군에 자신들의 신변을 맡겼고 눈가리개를 한 채 계속 이동을 이어갔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파리 외곽의 콩피에뉴 숲이었는데 지금부터 프랑스, 영국 대표들과 함께 1 차대전에 종지부를 찍을 회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회담이었지 그 내용은 사실상 독일에 대한 연합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특히 프랑스의 대표였던 포슈(Ferdinand Foch) 원수는 독일에 강경했고 일체의 타협 여지가 없는 가혹한 휴전 조건을 제시했다. 이 조건에 따르면 독일은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했고 무기와 포를 포기하고 거대한 해군을 연합군에 넘겨야 했다. 무엇보다도 수용하기 힘들었던 것은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있는 모든 해외 식민지의 상실이었다. 독일 대표단에게는 너무나도 분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독일 국내는 킬(Kiel) 군항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반란으로 촉발된 혁명이 베를린과 뮌헨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결국 회담 중인 11 월 9 일에 황제인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며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독일에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일 대표단은 이틀 후인 11 월 11 일에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무조건 항복에 서명한다(아이러니하게도 22 년 후인 1940 년, 같은 장소 및 열차에서 이번에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4 년 간에 걸쳐 전 세계에서 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던 거대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휴전은 1918 년 11 월 11 일 11 시에 발효되었는데 서부 전선 전체에서는 해당 시간부터 즉시 전투가 중단되었다(동부 전선에서는 이미 동년 3 월 3 일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종전이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음에 감사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많은 병사들은 환호성과 함께 노래를 불렀고 술을 나누면서 생존과 함께 승리를 기뻐했다. 반대편 참호에 있던 독일군들은 그렇게 기뻐하지는 않았는데 어찌 됐던 집에 길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축하했다. 곧이어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독일의 병사들이 수많은 전우들의 시체로 뒤덮였던 무인 지대로 기어 나왔고 함께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서로를 경계하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담배나 가벼운 기념품을 서로 교환했고 살아남았음과 전쟁이 끝났음을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패전한 독일군 중에서 많은 이들이 극도로 침울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종전 시까지 프랑스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패배자로 전략했던 것이다. 많은 독일 병사들이 자신들이 적의 땅을 점령하고 전투에서 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항복해야 하는 이상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러한 병사들 중 한 명이 북부 독일의 파제발크(Pasewalk) 군 병원에 있던 ‘아돌프 히틀러(Adolph Hitler)’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출신 육군 상병이었다. 그는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출신으로 최전선에서 연락병으로 근무했는데 통신이 원활치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연락병은 가장 위험한 보직 중 하나였다. 당시 히틀러는 임무 수행 중 겨자 가스 중독으로 일시적 실명 상태에 빠졌고 치료 차 요양 중이었다.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였던 이 콧수염을 기른 병사는 훗날 그의 넋두리를 모아 놓은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종전 소식을 듣고 침대에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라고 술회했다.


전선의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독일은 패배했고 제국은 통일 이후 반세기 만에 무너졌다. 많은 독일군들이 무장을 해제당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조국의 모습은 몇 년 전 자신들이 떠날 때 보았던 것 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우선 연합군의 장기간 봉쇄 정책을 통해 식량 배급이 넉넉지 않았던 까닭에 많은 독일인들이 굶주렸고 일부 지역은 아사자가 나오기도 했다. 굶주림 못지않게 무서웠던 것은 독일 내를 휩쓸고 있는 좌익 혁명의 열풍이었다. 1919 년 초부터 베를린에서는 스파르쿠스단(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을 주도한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름을 따옴)이라 불리는 극좌 단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우익 제대군인 단체인 자유군단(Freikorps)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4 월에는 남부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된다. 이들은 부르주아들을 체포하고 자본가와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거나 화폐를 폐지하는 등의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은 역풍을 맞게 되었고 한 달 후인 5 월 초에 우익 세력의 반격에 의해 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좌익 정권은 무너졌지만 문제는 혁명을 주도한 이들 중 지도자급 중 많은 이들이 유대계였다는 점이었다. 베를린의 혁명을 이끌었던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나 바이에른 소비에트의 주역인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그리고 오이겐 레빈(Eugen Leviné) 등이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미 러시아혁명에서도 붉은 군대의 창설자인 트로츠키(Leon Trotsky)와 최고 행정 책임자였던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현재 러시아의 예카테린부르크는 소련 시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불리었다)를 비롯한 여러 유대인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독일 인근의 헝가리에서도 쿤 벨라(Kun Béla)라는 유대인이 소비에트식 혁명을 주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 정복을 위한 유대인들의 국제적 음모라는 괴담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킬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반란도 혁명을 위한 좌익 측의 계획의 일환이라는 소문이 독일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번져 나갔다. 한마디로 말해 국제적인 유대인 네트워크의 음모에 더해 좌익 독일인들의 배신을 통해 승기를 다 잡았던 독일 제국이 내부에서 칼을 맞으며 패배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음모론자들에 의해 ‘배후중상설(Dolchstoßlegende 독일어로 칼로 찌른다는 의미)’로 불리었고 특히 우파 성향의 독일인들에게 마치 하나의 이론처럼 맹신되었다. 다가올 시대의 공포가 서서히 뿌려지고 있었다.


이상한 정당의 우두머리

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을 창설한 안톤 드렉슬러

독일이 1 차대전에서 패했을 때 뮌헨에 거주했던 34세의 자물쇠제조공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는 다른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비록 드렉슬러 자신은 신체적인 문제로 군대에 징집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1 차대전의 패배를 등뒤에서 조국을 칼로 찌른 ‘11 월의 배신자들’ 때문이라고 분노했다. 드렉슬러는 자신과 같이 분노로 강하게 뭉쳐 있던 뮌헨의 다른 독일인들과 자주 회합을 가졌고 급기야 1919 년 1 월에 독일노동자당(DAP)을 창설하게 된다. 이름만 보면 마치 여느 사회주의 노동단체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당은 반공산주의에 반자본주의 그리고 범 게르만주의와 반유대주의 등 다소 혼란스러운 여러 사상들이 뒤섞인 ‘잡동사니 당’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좌익과 우익의 대결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러한 가운데 사방에 정당임을 내세우는 정치적 압력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독일노동자당도 이러한 마구잡이 단체 중 하나였다. 드렉슬러는 당의 의장으로서 대외적인 강연 및 대중 집회를 통해 당원 모집에 힘썼다. 1919 년 9 월 초 어느 때와 같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자(利子)의 노예’에서 벗어나자는 반자본주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 후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콧수염을 기른 한 무명의 사내가 바이에른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교수와 맹렬히 싸우게 되었다. 콧수염의 사내는 군에서 독일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군인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그날 무명의 콧수염 사내가 상대 교수를 토론에서 압도하며 궁지에 몰아넣었다. 드렉슬러를 비롯한 많은 청중들이 그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보았다. 토론이 끝나고 드렉슬러는 그 군인에게 다가가 자신의 반유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동시에 반공산주의적인 팸플릿을 건네어주었고 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다. 이렇게 해서 독일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의 ‘55 번째 당원’이 되었다. 히틀러가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하기 전후 시기에 프랑스 파리에서는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승전국과 패전국은 1919 년 6 월 28 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서명을 하며 패전국에 대한 강화 조건을 마무리 지었다. 일명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려진 이 협정으로 인해 독일인들은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독일은 영토 측면에서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에, 서부 프로이센은 폴란드에 빼앗기게 되었다. 발트해의 단치히시(현재의 폴란드 그단스크)는 국제관리지구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독일 영토인 동프로이센이 본토와 분리되었다(이것이 훗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2차 대전의 한 원인이 된다). 국방 측면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가까운 라인강 서쪽에 군대를 주둔할 수도 없었고 비행기나 탱크 및 잠수함 등의 무기를 보유할 수도 없었다. 또한 현대전의 중추인 참모본부도 가질 수 없었고 군인은 치안 유지나 가능한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인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게 전가시켰던 것인데 독일인들은 강대국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일어난 1차 대전을 자신의 조국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며 격앙되었다. 더불어 승전국은 독일에게 전쟁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물었고 1,320 억 골드마르크(Goldmark: 4,700 톤의 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라는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부과했던 것이다. 특히 보불 전쟁(1871 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패배 시 독일에 배상금을 지불했던 프랑스가 배상금 부과에 적극적이었다. 이 금액은 오늘날 환율로 계산하면 무려 미화 3 천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독일인들은 울분을 달랠 길이 없었지만 패자로서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독일의 미래 세대는 승전국을 위한 배상금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것처럼 보였다. 1920 년대에 들어서자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개칭했는데 독일어 약어를 따서 ‘나치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의 상징으로는 고대 게르만족의 행운의 상징인 만자(卍字)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사용되었다. 당의 깃발에는 순수한 독일인의 피를 상징하면서 노동자 계층에 어필할 수 있는 붉은색 바탕이 사용되었다. 이때쯤 히틀러는 군에서 완전히 제대하며 나치당 활동에 전념하였다. 사실 당시 나치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당으로서 일체감을 고취하기 위해 당의 무력 조직인 돌격대부터 유니폼을 입었다. 유니폼의 색상은 진한 황갈색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구독일령 아프리카 파견군을 위한 피복이 시장에 싸게 나온 것을 대량으로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황갈색 유니폼과 검은색 타이를 메고 왼팔에 나치 완장을 차고 다녔던 것이 당시의 전형적인 나치당원들 모습이었다. 히틀러는 이들과 함께 뮌헨의 대규모 비어홀을 돌면서 당의 여러 강연에 참여하였다. 사실 남부 독일에서 비어홀만큼 사람들을 모으기 좋은 곳도 없었다. 뮌헨에는 많은 비어훌이 있었는데 규모가 넓어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이기 용이했고 무엇보다도 맥주를 통해 술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쉽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비록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비어홀에서 일련의 집회들을 통해 자신의 악마적인 연설 능력을 발견했고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히틀러는 대중 선동의 방법에 대해 나름의 방식을 완성했는데 울분에 찬 청중들에게 ‘공공의 희생양’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모두의 분노를 돌리게 했다. 이것은 음성의 강약을 고조시키고 몸의 제스처를 극적인 효과를 통해 더욱더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시 독일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렸고 이들을 독일에서 타도하고 추방할 것을 주장했다. 히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하나의 몸통을 가진 같은 뱀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들 모두 유대인이 조종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히틀러는 청중들과 당원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며 빠르게 그 존재를 부각할 수 있었다. 또한 당내 그의 멘토가 된 기자 출신의 디트리히 에카르트(Dietrich Eckart)를 통해 뮌헨의 여러 상류층 및 유력 인사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순식간에 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1921년이 되자 그의 위상이 의장인 드렉슬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921 년 7 월에 당내 투표에서 533 대 1의 결과로 드렉슬러를 제치고 당의 ‘의장’을 대신한 ‘지도자’ 자리를 차지했다. 나치당 내에는 카리스마 있던 히틀러에게 점차 지지를 넘어 신봉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그를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생각한 미래의 부총통 루돌프 헤스(Rudolf Heß)나 1 차대전 시 최고 에이스들의 집합소인 리히트호펜 비행대 조종사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같은 이들이었다. 특히 괴링은 독일제국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수훈자이자 사교계의 명사로서 유력자들이 나치에 금전적 지원을 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독일 아이들이 가치가 없어진 마르크화 지폐를 쌓으며 놀고 있는 모습

승전국에 대한 독일의 배상금은 1921 년 중반에 첫 상환되었다. 문제는 이후 독일 정부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외화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독일 정부의 해법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마르크화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1921 년 중반에 1 달러 당 90 마르크였던 환율이 1 년 후인 1922 년 중반에는 330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이후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동년 12 월에는 무려 1 달러당 7,400마르크까지 올라가며 지옥문이 열리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승전국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중단해 버리게 된다. 이에 독일의 최대 앙숙이었던 프랑스는 독일 정부가 의도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고 1923 년 1 월에 이웃 벨기에와 함께 독일 최대 공업 지대인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외국군의 점령에 대항하여 독일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즉시 독일의 산업 생산이 마비되었다. 더불어 가치가 떨어진 마르크화는 물가를 하늘 높이 치솟게 만들었다. 이제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지폐 뭉치를 들고 가야 했고 전 국민의 은행 저축이 휴지조각이 되었다. 환율이 미쳐 날뛰었던 1923 년 하반기에는 1 달러당 ‘조’ 단위의 마르크가 고시되는 믿기 힘든 상황이 펼쳐졌다.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은 가치가 떨어진 마르크화를 난방용으로 태우거나 벽지 대용으로 사용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술주정뱅이가 먹다 버린 술병이 동 무게의 지폐보다 비싸다는 블랙 유머가 돌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또한 독일의 각 지역 주들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분리 독립하자는 움직임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무력했던 빌헬름 쿠노(Wilhelm Cuno) 수상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수많은 문제만을 남긴 채 쿠노는 8 월에 사임하게 된다. 이후 한때 왕정을 지지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이 신임 수상 겸 외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국통화위원인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를 통해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한 신규 화폐인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도입하였다. 1 렌텐마르크는 대략 1조 마르크의 비율로 교환되었는데 다행히도 이때 이후로 물가가 진정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물가가 조금씩 잡히고는 있었지만 독일 사회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외국군의 무력 점령에 이은 경제의 위기에 더해 곳곳에서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인 대립과 폭력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에서는 식민지 출신 흑인 병사들이 독일 여성들과 관계하여 사생아가 태어났는데 많은 독일인들이 이 아이들을 ‘라인의 호래자식들(Rheinlandbastard 흑백 혼혈아들은 최대 2 만 5 천 명에 달했으며 나치 시대에 심한 차별을 받았다)’이라고 부르며 민족의 수치로 여겼다.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바이에른 등에서 그들의 규모는 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커져 있었다. 게다가 무력 조직인 돌격대(SA Strumabteilung)가 준군사 조직 수준으로 확장되어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군소 정당이 아니었다. 이제 나치는 자신들의 존재를 바이에른을 넘어 독일 전국적으로 드러낼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만한 사건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1 년 전 따뜻한 남쪽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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