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금융과 무역 중심지인 싱가포르는 적도 바로 위에 위치한 상하의 도시이다. 1년 내내 25도에서 30도 사이의 무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되는데 1942년 2월 15일도 마찬가지였다. 이 날 한 무리의 카키색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포드 자동차’ 공장에 모였다. 불과 넉 달 전에 가동을 시작한 ‘아르데코’ 양식 건물의 한 회의실에서 일본과 영국의 군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의 주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싱가포르 내 양국군의 전투 종결에 관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주제를 얘기하는 가운데 일본 측 통역장교의 영어 내용 전달이 매끄럽지 못해 귀중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결국 답답한 상황에 인내심이 바닥이 난 거구의 일본측 장군이 책상을 치며 영국 측에 항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강한 어조로 물었다. 영국측 대표인 콧수염을 기른 장군은 그 기세에 풀이 죽어 ‘항복하겠다’고 힘 없이 대답했다. 이로서 대영제국은 1819년 식민통치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극동의 보석’이던 싱가포르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영국군 중장인 54세의 ‘아서 퍼시벌’은 1941년 4월에 말레이 방면 담당 사령관으로 현지에 부임하게 된다. 다소 마른 체형에 콧수염을 기른 그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얼마전까지 프랑스 전투와 영국 본토 방위에 전념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1938년까지 2년 간 말레이에 참모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그곳의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그는 전운이 고조되는 현지에 다시 투입된 것이다. 그는 말레이에 가기 위해 영국에서부터 지브롤터, 말타, 이집트, 인도 및 버마를 거쳤는데 말레이에서 기나 긴 여정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의 영국은 본토에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독일공군의 공격을 간신히 막으며 잠시 한 숨을 돌리는 상황이어서 극동의 식민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퍼시벌이 방어하려는 말레이/싱가포르 지역은 생각보다 넓었고 그가 지금까지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 본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그의 휘하 부대들은 상당수가 인도 및 말레이계 토착민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사기는 물론 장비도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1941년 이후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일본군의 침략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자 영국도 손만 놓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 전함 ‘리펄즈’를 포함하는 ‘Z함대’를 편성하여 말레이/싱가포르로 파견하게 된다. Z함대는 1941년 12월 2일에서야 싱가포르에 도착했는데 불과 일본군이 공격하기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싱가포르에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운명을 결정 지을 일본군 측의 장군은 당시 56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18기 출신으로 1차대전 시 산동반도에서 독일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전후 스위스, 독일에 무관부 소속으로 근무하며 국제 감각과 정세를 익혔다. 귀국한 야마시타는 육군 내 국제통 엘리트로 평가받으며 육군성의 주요 요직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30년대 중반 이후 군부 내 파벌 싸움 등에 밀려 중국, 만주의 후방 사단으로 좌천되는 등 기복이 있는 군 생활을 하게 된다. 특히 권력 실세인 수상 ‘도조 히데끼’와는 파벌 상 대척점에 서는 입장이어서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게 되었다. 야마시타는 호전적이고 불 같은 이미지에 우람한 풍채를 통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인상으로 부드럽지만 유약해 보이는 영국군의 퍼시벌 장군과는 외견상 반대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해외 근무를 통해 일찍 국제 정세에 눈을 뜬 그는 일본이 초강대국인 미국이나 영국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야마시타의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41년 11월에 제25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공격을 총지휘하게 된다.
야마시타 휘하의 부대는 1941년 12월 8일 태국의 ‘파타니’와 말레이 동북부의 ‘코타 바루’ 두 군데에 상륙을 했다. 일본군은 영국군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고 싱가포르를 목표로 쾌속으로 남진하게 된다. 당시 공격하는 일본군은 최초 3만 6천명이었고 방어하는 영연방군은 총 10만 명 이상으로 오히려 일본군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러한 수적 열세를 만회하는 여러 상황들이 펼쳐지게 된다. 우선 영연방군이 순식간에 제공권을 상실했다는 점인데 영국군의 ‘F2A 버팔로’ 등 구식 전투기는 ‘Ki-43 하야부사’와 같은 민첩한 일본기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영국의 공군력이 약화하자 일본 비행기는 자유롭게 공격을 하게 되었는데 12월 10일 영국 Z함대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즈’가 일본군 폭격기에 의해 침몰하게 된다. 영국군 지휘부 및 본토의 처칠 수상 조차도 자국의 상징과 같은 배가 침몰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일본군은 ‘전술과 창의성’에 있어서도 영국군을 압도하였다. 영국군은 말레이의 울창한 정글에 전차가 부적합 하다고 판단했고 한 대도 보유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군은 비록 장갑은 얇지만 나름 37mm이상의 주포를 탑재한 중소형 전차 150대를 투입하여 보병을 지원했고 영국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돕기 위해 일본군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전거를 대량으로 사용하였으며 얇은 하천에서는 공병대가 직접 나무를 받치며 ‘인간 다리’ 역할을 했다. 일본군의 ‘아시아판 전격전’을 통해 영국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1월까지 두 달 동안 후퇴만 거듭하게 된다. 2월초가 되자 영국군 ‘최후의 보루’인 싱가포르만이 남게 되었다.
서류 상 8만 5천명의 영연방군 병력 중 방어의 핵심은 호주군 8사단과 1월말에나 현지에 도착한 영국군 18사단이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본토와 ‘조호르 해협’을 두고 갈라져 있는데 서쪽은 ‘망그로브 습지’가 있었던 반면 동쪽은 상대적으로 상륙에 용이했다. 퍼시벌은 일본군이 서쪽의 습지 보다는 동쪽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 곳에 주력을 배치한다. 하지만 2월 8일 저녁 일본군이 야습을 개시했을 때 그들은 서쪽으로 주공을 가했다. 일본군의 맹공과 호주군의 잘못된 내부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해 서쪽 진지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음 날인 9일 일본군은 주요 목표인 ‘탱가 비행장’을 점령했고 계속 영연방군에 압박을 가했다. 일본군은 2월 13일에 시내 상수도 저수지를 점령하면서 결정적인 전략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야마시타는 퍼시벌에게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나 사실 이때는 일본군도 보급품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야마시타 역시 영국군이 반격을 가하면 일본군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결국 내부 회의를 통해 항복을 결정한다.
영국군의 항복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다. 특히 최후까지 모두 싸우다 죽을 것을 명령한 수상 처칠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영국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고 그것도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무시했던 황인종에게 당한 결과였다. 무려 10만명의 영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 절반인 영국 및 호주군은 각지의 일본군의 수용소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며 노예처럼 혹사당한다. 인도 출신 포로들 중 2만명 정도가 일본에 의해 지원받던 반영 정치가 ‘찬드라 보스’의 부대에 합류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노쇠한 주인을 바라보는 식민지 주민들의 시선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1942년 2월의 싱가포르는 대영제국 몰락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