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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3. 2022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대회

20세기 100장의 사진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 당시 악수 중인 우루과이(좌)와 아르헨티나(우)의 주장들

1930년 7월 30일, 남반구의 겨울 임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는 사람들의 엄청난 열기 속에 도시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 열기의 진원지는 바로 10여일 전 개장한 ‘독립 100주년 경기장’이었다. 9만 3천 명의 수용인원을 자랑하는 엄청난 규모의 경기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고 많은 사람들이 우루과이 국기를 흔들면서 자국팀의 축구 경기를 응원하는 중이었다. 경기는 상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우루과이의 상대는 비록 이웃나라지만 당시 축구에서는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아르헨티나였다. 전반전은 우루과이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가 2점을 뽑으며 2대 1로 앞서간다. 후반전부터 우루과이는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며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공격수인 ‘호세 세아’가 후반 12분에 동점골을 기록했고 10 여분 후에 레프트윙인 ‘산토스 이리아르테’가 역전골을 넣었다. 자국팀의 리드를 통해 경기장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고 경기 종료 직전 주전 공격수 ‘액토르 카스트로’가 마무리 골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굳혔다. 마침내 주심이 종료 휘슬을 불었고 우루과이 선수들은 기쁨에 겨워 경기장을 마구 뛰어다녔다. 우루과이가 ‘제1회 월드컵 대회’에서 숙적인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제1회 월드컵 대회가 열리기 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1932년에 예정되었던 ‘로스엔젤레스 하계 올림픽’과 관련이 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는 ‘국제축구협회'(FIFA)와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자격에 관해 이견을 가지고 있었고 상호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올림픽 조직 위원회는 축구가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로스엔젠레스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해 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국제축구협회의 ‘쥘 리메’ 회장은 전부터 구상해 왔던 ‘국제 축구 대회’ 신설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이 대회는 올림픽처럼 4년마다 개최되고 아마추어는 물론 당시 증가하고 있던 프로선수들도 포함하는 전세계 축구인들의 잔치가 될 것이었다. 여러 회원국들이 이러한 제안을 지지했고 협회는 신속하게 개최국을 선정하는 절차로 넘어가게 된다. 대회는 1930년 개최를 목표로 했는데 개최를 희망한 후보국으로는 당시 축구 강국이던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와 우루과이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우루과이가 강력한 개최 후보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의 올림픽 축구를 2연패한 자타공인 ‘세계 축구 챔피언’이었다. 더불어 국가적인 명분도 있었는데 1930년이 우루과이가 브라질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 되는 해였던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하나, 둘 양보하는 가운데 결국 우루과이가 최종 개최지로 결정됐다.


대회 개최 결정이 난 후 본격적인 참가국 선정 절차가 이루어졌는데 현재와 같은 지역 예선 없이 참가 희망국은 모두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는 여객기가 대중화되기 전이었고 유럽 등에서 남미 까지는 보름 이상 걸리는 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대공황 시기인지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우루과이는 ‘국가의 대사’를 제대로 진행시키기 위해 ‘비용 분담’이라는 당근책을 제시하며 참가국을 모았다. 최종적으로 미주와 유럽에서 13개국이 참가한다. 미주 대륙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등 남미 7개국과 미국, 멕시코의 북미 2개국 등 총 9개국이 참가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동거리 상의 한계와 선수들의 생업 등을 이유로 대회 두 달전까지 아무도 참가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주최국 우루과이와 국제축구협회의 설득을 통해 최종 4개국이 참가했는데 쥘 리메 회장의 고국인 프랑스와 인접국인 벨기에, 축구강호 유고슬라비아 및 루마니아였다. 루마니아는 국왕인 ‘카롤 2세’가 직접 선수들의 고용주들을 설득하여 선수들이 복귀 후에도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았다.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유럽 각 국 선수들은 이탈리아 제노바와 프랑스 남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치는 경로를 통해 남미로 이동했다. 중간 기항지인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는 브라질 선수단도 동승했고 마침내 모두 한 배로 우루과이에 입성했다.


13개 팀은 4개조로 나뉘어서 ‘리그전 방식’으로 경기를 실시했고 각 조 1위가 준결승에 오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루과이는 대회를 앞두고 ‘독립 100주년 경기장’을 건설했지만 경기장은 대회 개막일인 7월 13일까지 완공되지 않아 개막경기는 서로 다른 경기장에서 두 경기가 동시 진행되었다. 겨울 눈발이 날리는 오후 3시에 동시 시작된 경기는 1조의 프랑스와 멕시코 그리고 미국과 벨기에의 대결이었고 각각 프랑스가 4대1, 미국이 3대 0으로 승리했다. 대회 첫번째 골은 프랑스팀에서 나왔는데 경기 시작 19분 만에 ‘푸조 자동차’ 근로자 출신인 ‘뤼시엥 로랑’의 발끝에서 완성되었다. 160센치미터의 단신인 그는 멕시코의 거친 태클에 따른 부상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을 이용하여 상대편 수비를 교란했고 월드컵 첫 골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조 1위는 남미의 맹주이자 우루과이의 라이벌인 아르헨티나가 차지했다. 2조는 유고슬라비아, 브라질과 볼리비아가 있었는데 유럽의 강 팀인 유고슬라비아가 다른 남미의 강호 브라질을 이기고 조 1위가 되었다. 3조는 개최국 우루과이가 홈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루마니아와 페루를 물리치고 무난히 조 1위가 된다. 마지막 4조 1위는 미국이었는데 상대적 약체인 벨기에와 파라과이를 무실점으로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준결승 첫 번째 경기는 7월 26일에 벌어진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경기였다. 비가 와서 경기장이 미끄러운 가운데 아르헨티나가 경기를 지배했고 6대 1이라는 학살에 가까운 스코어로 미국을 유린했다. 다음 날 벌어진 우루과이와 유고슬라비아의 경기는 유고슬라비아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 가는 모양새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루과이라는 ‘무서운 벌집’을 건드린 것이었고 엄청난 공격력을 앞세운 우루과이는 전 날과 똑같은 6대 1이라는 스코어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의 ‘호세 세아’ 선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한다. 이렇게 최종 결승에 오를 두 팀이 가려졌고 두 나라의 경기를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에서는 배편을 이용해 많은 응원단들이 몬테비데오에 도착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통해 브라질로부터 독립한 과거가 있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양 국은 친한 이웃이었지만 이때 결승전만큼은 상호 대결의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았다. 지난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에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에 2대 1로 패한 전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전투적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드디어 7월 30일 오후 3시 30분 제1회 월드컵의 결승전이 시작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건너오는 수만명의 군중들은 미쳐 몬테비데오 항구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심판들이 경기 주심 맡기를 거부할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했고 결국 경기 당일 날이 되어서야 겨우 벨기에 출신 심판이 주심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심판을 맡으며 경기 직후 배를 타고 우루과이를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양 국은 사용 공에 있어서도 서로 자기 공을 사용하겠다고 신경전을 펼쳤는데 결국 전반전은 아르헨티나 공으로 후반전은 우루과이 공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양 측 주장이 우호적인 인사를 교환한 후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예상대로 엄청난 접전이 벌어졌다. 전반 12분 우루과이가 선제골로 기선을 잡나 했지만 아르헨티나는 두 골을 연거푸 넣으며 지난 올림픽의 설욕을 다짐했다. 후반전에 들어가기 전 우루과이의 주장인 ‘호세 나사시’는 선수들을 힘차게 다독거리며 함께 선전을 다짐한다. 그의 독려가 약이 되었는지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페이스로 흘러갔고 후반 12분에 동점골을, 23분에 역전골을 터트리는 기염을 토했다. 경기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아르헨티나는 거칠게 몰아붙이며 전세를 뒤집으려 했지만 경기 종료 직전 우루과이의 ‘엑토르 카스트로’가 골대 왼쪽 깊숙이 들어가는 쐐기 골을 넣었고 4대 2의 스코어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승리가 확정되자 우루과이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후안 캄피스테기’ 대통령이 다음 날인 7월 31일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할 정도였다. 이러한 흥분과 기쁨의 이면에는 다른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분노한 아르헨티나 군중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우루과이 영사관을 습격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우승 트로피 (쥘리메 컵) 전달은 당시 경기장에서는 실시되지 않았고 우루과이 축구협회장에 전달되어 다음 대회까지 보관되었다.


이렇게 제1회 월드컵 대회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34년의 제2회 대회는 유럽의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는데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자국의 국력과 정치 선전의 장으로서 활용했다. 우루과이는 과거 유럽 국가들의 텃세를 기억하며 2회와 3회 프랑스 대회에 불참한다. 2차대전 동안 중단되었던 경기는 1950년에서야 브라질에서 재개되었고 우루과이가 개최국인 브라질을 누르고 다시 우승한다. 이후 월드컵은 매 4년 마다 전세계인을 움직이는 거대한 축제로 승화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쥘 리메라는 프랑스인의 헌신을 통해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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