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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Aug 16. 2024

3. 붉은 태양을 저물게 했던 하늘의 호랑이들(下)

플라잉 타이거즈, 중국을 지원했던 미국인 의용조종사들(1941~1942)


창공에서의 포효

편대 비행 중인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 전투기들

이들의 첫 번째 전투는 1941년 12월 20일에 벌어졌는데 장소는 1, 2 비행대가 있던 쿤밍 상공이었다. 의용대는 이곳에서 일본 육군항공대의 ‘가와사키 99식 쌍발 경폭격기’ 10대를 요격하게 된다. 이때까지 일본군은 사실상 중국 공군이 사라진 쿤밍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는데 갑작스러운 의용대의 요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순식간에 3대가 격추되었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일본군은 폭격기들이 공격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쿤밍에 대한 공습을 중지했는데 이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을 때 나온 보기 드문 반격이었다. 사실상 이 항공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군 전체에 첫 번째 승리라 말할 수 있었다. 한편 18대로 구성된 랭군의 제3비행대는 진격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일본군은 12월 23일 랭군 일대의 연합군 항공 전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기지와 활주로에 대대적인 항공 공격을 가했는데 ‘미쓰비시 97식 중폭격기’와 ‘97식 경폭격기’ 및 ‘나카지마 97식 호위 전투기’ 등을 집중 투입하였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공격에서 일본군 폭격기 여덟 대가 요격당했고 고정식 랜딩기어(Landing gear: 착륙용 바퀴)를 장착한 구형 호위전투기들 역시 의용대에게 가볍게 격추되었다. 반면에 플라잉 타이거즈는 세 대가 격추당했는데 연합군 측의 활주로도 파괴되고 수 대의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이 육지와 해상에서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패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의용대의 이 연속적인 ‘하늘에서의 분투’는 가히 ‘메마른 땅에 퍼붓는 단비’와 같았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활약에 가속도가 붙었고 의용대는 점점 더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영국령 홍콩이 항복했던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일본군은 더욱 많은 항공기로 랭군을 공격해 왔는데 63대의 폭격기와 25대의 호위전투기를 동원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호위전투기는 상당수가 일본군의 어느 전투기 보다 신형이었던 ‘나카지마 1식 하야부사’였다. 여기에 맞서는 연합군은 의용대의 P-40 14대와 영연방군 소속의 통통한 구형 버펄로(Buffalo) 전투기 15대가 있었다. 이날 연합군기 29대와 일본군기 88대의 일방적 대결의 결과는 놀랍게도 연합군의 완승이었는데 무려 35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격추당했다. 반면 연합군의 손실은 총 13대였는데 영국군의 구형 버펄로 전투기 여덟 대가 격추당했고 의용대는 상대적으로 적은 다섯 대의 P-40만 상실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전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셔놀트는 일본군과 맞서기에 앞서 냉철한 자기 분석을 했다. 무엇보다도 의용대가 운용하는 P-40에 대한 철저한 평가가 중요했는데 최고 580km의 최고속도는 당시 어느 일본군 전투기 대비 빠른 속도였고 분명한 장점이었다. 또한 튼튼한 강성의 기체는 적기로부터의 피탄(被彈)에도 상당한 수준의 생존능력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점에 비해 P-40의 가장 큰 문제는 보다 가볍고 날렵한 일본 전투기 대비 ‘선회 능력’이 떨어졌다는 점이었고 셔놀트는 일본기 앞에서 선회 비행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설계 스펙상 P-40은 저고도에서 지상 지원을 하는데 최적화된 전투기였는데 특히 급강하 공격 능력이 일본기 대비 상당히 우수했다. 이러한 장점을 살리기 위해 셔놀트는 2인 1조로 된 의용대 전투기를 일본기가 오기 전에 미리 중고도 이상에 대기시켜 놓고 다가오는 적기 위에서 빠르게 기습공격한 후 이탈하는 공격 방식을 채택한다. 이를 위해서는 습격하는 일본기들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대비하는 조기 경보 시스템이 매우 중요했다. 셔널트는 이러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적기의 예상 이동 경로에 맞추어 감시 초소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였다. 이것은 ‘영국 항공전(Battle of Britain)’ 당시 영국군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시스템이었다. 더불어 셔널트는 자신의 부하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모험을 원하는 남성적인 기질의 소유자들이었고 술과 유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투를 좋아했다. 셔널트는 숫자상으로 충분치 않았던 부하들이 부대 주변의 유흥가에서 성병에 걸려 전투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을 가장 우려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셔널트는 질병 관리가 되는 매춘업소를 열게 하고 영어가 가능한 여성 접객원을 고용하도록 중국 측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청교도적이고 자기 절제가 강했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인 조지프 스틸웰(Joseph Stilwell) 장군과 때때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듯한 신사였던 스틸웰에게 셔널트의 이런 요청은 미군 장교의 위신을 깎아먹는 저급한 행동이었던 반면 셔놀트는 최상의 전투 준비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이해 못 한다며 스틸웰을 미워했다. 서로 자라온 환경이나 기질이 달랐던 둘은 장제스에게 상대방을 해임하라고 직접 제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둘을 훗날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에서 만났던 영국군 참모총장 앨런 브룩(Allan Brooke) 장군이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브룩은 “스틸웰은 비전 없는 괴짜이며 셔널트는 용감하지만 두뇌가 다소 부족하다”라고 평가했다. 비록 셔널트에 대한 브룩 장군의 평가는 상당히 박했지만 적어도 그가 용감하고 저돌적이라는 것은 인정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 태평양에서는 아직 연합군이 불리했던 시기였고 이럴 때일수록 셔널트와 같은 성향의 맹렬한 지휘관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짧은 활약 뒤 영원한 전설로 남다  

플라잉 터이거즈 조종사들 재킷 뒤에 붙어있던 안내문

1942년 초가 되자 연합군의 전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일본군은 남쪽으로 말레이 반도를 가로질러 싱가포르 공략을 위해 남진하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버마로의 육상 공세를 본격화했다. 12월부터 버마로 공격했던 일본 15군은 영국군의 저항을 간단히 물리치며 수도인 랭군 방면으로 맹렬한 진격을 지속했다. 육지에서의 이러한 상황에서 플라잉 타이거즈 비행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이들은 일본군 폭격기와 호위기의 요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월 24일에는 6대의 97식 호위전투기를 만나 전부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1월 28과 29일 중에도 7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놀랍게도 이때까지의 플라잉 타이거즈와 일본군의 교전비는 무려 16대 1이었다. 당시 일본군 비행기들의 숫자가 압도적이었고 조종사들의 경험과 실력이 더 우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지상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고 플라잉 타이거즈 대원들 역시 철수해야만 했다. 2월 말에 랭군이 일본군 손에 떨어진 이후 대원들은 북쪽 480km에 위치한 마그웨(Magwe)의 영국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이어갔다. 이때 즈음에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소모율도 상당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3개 비행대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3월 중순에는 가동 가능한 전투기가 10대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3월 말에 비행대는 좀 더 북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중국의 바오샨(保山)을 거쳐 쿤밍으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버마가 완전히 손아귀에 들어오자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항공 보급로의 종착지이자 플라잉 타이거즈의 기지였던 쿤밍이 되었다. 5월 7일에 일본군은 중국과 버마의 국경인 살윈 강 상류에 부교를 부설하여 대규모 도하를 시도했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도하가 성공한다면 이후 바오샨을 거쳐 쿤밍까지 진격은 시간문제였고 중국 동남부에 큰 위협이 될 터였다. 중국군은 긴급히 2개 사단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다. 이때 플라잉 타이거즈는 새로 공급된 P-40E형을 투입했는데 나흘 동안의 항공 공격을 통해 중국군을 지원했다. 플라잉 타이거즈 전투기들은 500파운드 폭탄을 장착하고 번갈아 가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결과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는데 일본군의 진격은 좌절되었으며 전선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플라잉 타이거즈는 베트남 북부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 공격기들을 요격하며 중국군을 지원하고 시민들을 보호했다. 한편 의용대 조종사들의 비행 재킷 뒷면에는 만약의 불시착이나 격추 시를 대비해서 중국어로 “중국에 와서 우리의 전쟁을 도와주는 서양인들이니 군민이 하나 되어 도와 주시요(來華助戰洋人(美國) 軍民一體救護)”라고 적혀 있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이미 중국 내에서도 유명한 부대였다. 많은 중국인들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는 이 푸른 눈의 사나이들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플라잉 타이거즈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은 미군 지휘부는 이들을 미군이 지휘하는 부대로서 재편하고자 했다. 마침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미군 지휘부는 플라잉 타이거즈를 공식적으로 해체했고 미 육군의 ‘중국항공특임대(China Air Task Force)로 개편된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첫 전투가 벌어진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 마지막 전투일에도 비행대는 4대의 일본군 전투기를 격추한다. 이후 부대는 다시 중국 주둔 미 육군항공대 소속의 ‘제14공군’으로 재편되었다. 공식적으로 미군 소속이 되면서 이들의 비행기 국적 표지는 중국군의 청천백일기에서 미군의 하얀 별 마크로 새로 도색되었다. 한편 대부분의 플라잉 타이거즈 조종사들이 신규 부대 합류를 거부했는데 이들은 ‘천성적으로 간섭을 싫어하는 보헤미안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중국에서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부대 분위기를 이끌어왔던 경험이 있었고 경직된 미군 조직에 다시 합류하기보다는 차라리 민간인이 되거나 다른 병과 또는 이전 부대로 전출을 요청했다. 이곳에서 활약했던 수우족 인디언 혈통의 그레고리 ‘패피’ 보잉턴(Gregory "Pappy" Boyington)은 원대인 해병대로 복귀했는데 이후 남태평양에서 그 유명한 ‘검은 양 비행대(Baa Baa Black Sheep)’를 이끌고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훗날 명예훈장을 받는다. 부대원 중 최고의 에이스는 로버트 닐(Robert Neale)로서 일본기 13대 격추를 인정받았다. 최종적으로 로버트 닐을 포함한 다섯 명의 조종사들 만이 부대에 잔류를 희망했는데 이미 4월에 준장으로 승진한 셔널트가 지휘관으로 유임되어 계속 활약했다. 비록 부대 자체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들의 용맹함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플라잉 타이거즈’라는 부대명은 미군 휘하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7개월의 활약 기간 동안 297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고 공인되었다. 12명의 조종사들이 전투 중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2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연합군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밝게 비추었던 등불이었고 고립되어 있던 중국과 서구라는 두 세계를 연결했던 가교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 그 영향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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