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으니 Jan 20. 2024

아랫집에서 택배를 찾았다

택배가 사라졌다 그 후


어제는 하루종일 사라진 택배에 마음이 홀랑 뺏겨버렸다. 회사 사람들도 지인들도 함께 걱정해 줬다. 어쨌든 다른 곳으로 잘못 배송했으니 택배 기사님이 회수해서 다시 배송해 주거나 보상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안심되긴 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내 소중한 책들을 어떻게든 찾고 싶었음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택배가 아랫집의 실수로 잘못 들어가 있다가 다시 현관 밖에 나와 있기를 바랐다.


새벽 배송만 하는 기사님과는 오후 4시 이후에야 연락이 된다고 했다. 아침엔 백 번 생각나던 것이 점심시간이 지나니 오십 번 정도 생각났다. 오후 4시만 기다렸는데 깜빡하고 5시쯤 택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죄송하다고 말하며 확인 후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5분쯤 지나자 상담원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담당 기사님과 연락했고 택배 회수 후 다시 배송해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사님이 새벽에만 배송하다 보니 배송이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당장 급하게 써야 할 것도 아니고 상하는 음식도 아니었고 찾기만 하면 되는 책이어서 나는 늦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곧 택배 기사님께도 전화가 왔다. 새벽에 분명히 배송했던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꼭 찾아서 다시 배송해 주시겠다며 죄송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곧 난감해하셨다. 아랫집에 잘못 배송된 상품을 찾으려면 새벽 1시쯤에 벨을 눌러야 하는데 하시며 말끝을 흐리시다가 혹시 아랫집 사람을 만나봤는지 물으셨다. 만약 아랫집에 택배가 있다면 기사님이 굳이 번거롭게 다시 오지 않아도 되었기에 퇴근 후 택배를 찾아보고 있으면 메시지를 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기사님께서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


찾고 싶었다. 배송 완료된 사진에는 분명 아랫집에 택배가 있었다. 아예 다른 곳에 배송되었으면 회수해서 재배송 받으면 끝이지만 집 앞에서 택배가 사라지니 여러모로 찝찝했다. 훔쳐갔다면 훔쳐간 대로 아랫집에서 들고 가서 모르쇠 하면 그런대로 찾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사는 빌라는 오래된 빌라라 CCTV가 없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속도 좋게 올리브영을 들렀다. 살까 말까 고민하던 화장품을 테스트해 보는 여유도 부렸다. 그래도 그리 오래 있진 않았다. 신호등을 기다리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제발 아랫집 현관 앞에 내 택배가 떡 하니 나와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랫집 현관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에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 없던 아랫집 현관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벨을 눌렀다. 아랫집 아주머니를 마주하는 게 긴장됐지만 내 택배를 찾아야 했다. 벨이 고장 났는지 반응이 없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두 번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길래 세 번째는 문을 두드리고 계세요?라고 간절히 불렀다. 그랬더니 아랫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드디어 아랫집 현관 문이 빼꼼 열렸다. 나는 얼른 미소를 띠고 물었다.


"안녕하세요. 00호에 사는 사람인데요. 오늘 새벽에 택배가 잘못 배송됐더라고요. 혹시 여기 앞에 있던 택배 못 보셨어요?"

"어머, 어머, 혹시 이건가. 책이 하나 온 것 같은데." 하고선 베란다 쪽으로 총총 뛰어가셨다.


책이라는 말에 안도감과 기쁨이 몰려왔다. 아주머니는 딸이 주문한 택배인 줄 알고 박스를 뜯었는데 어떡하냐며 책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라고 하셨다. 활짝 뜯긴 택배를 총총 들고 나오시면서 아이고 어떡해 어떡해 미안하다 말하셨다. 그 고약하던 아랫집 아주머니께서 미안하단다. 집에 딸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다고. 순간 아무리 딸이라도 딸 택배를 저렇게 뜯어서 확인하면 딸이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곧 박스쯤이야 뜯으면 뭐 어떤가. 내 책을 찾았는데. 그것으로 충분히 괜찮았다.


나는 아주머니께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호수가 헷갈려서 기사님이 종종 잘못 놓고 가시더라며 인사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집에 오자마자 택배 기사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주문서와 책을 확인하고 책장에 꽂았다. 책을 꽂으면서 생각했다. 새벽에 제대로 배송되었으면 이렇게까지 기쁘진 않았을 텐데. 잃었다가 다시 찾으니 너무 행복했다. 찾은 게 기뻐서 다른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다.


택배를 잃어버린 날은 이사 후 처음으로 아랫집 아주머니의 웃음을 본 날이기도 하다. 매일 화내던 목소리만 들었는데 상냥한 말투와 미안하다는 말도 세 번이나 들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꽁해 있던 마음이 헐렁헐렁하게 풀렸다. 아랫집을 지날 때마다 흥, 고약한 아주머니 하면서 안 좋은 기억만 떠올랐는데 앞으로는 택배를 주고받던 그 저녁을 기억할 것 같다. 이제는 아랫집 아주머니와 마주쳐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택배가 사라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