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공모전 대비반이 시작됐다. 까짓것 해보자! 용기 있게 지원했다가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겁이 났다. 그래, 내가 무슨 드라마 대본이야. 아직 기획안밖에 없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회사 일도 많고 바쁘고... 못 쓸 거야... 이미 못 하겠다는 결론을 내고서 이왕이면 직접 말씀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첫 ZOOM 모임에 참석했다.
하지만 교수님 얼굴 보니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고 결국 하게 됐다."어떻게든 쓰게 된다. 교수님이 멱살 잡고 끌고 간다. 교수님께 죄송해서 쓰게 된다." 이미 대비반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믿고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내 목표는 딱 하나. 중도 포기 하지 않는 것. 내용물이 아무리 하찮더라도 무조건 완성하는 것.
첫 ZOOM 모임을 마칠 때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모전 앞두고 꼭 몸이 아프다거나 갑자기 뭔가 급한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컨디션 관리 잘하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이틀 뒤 수요일, 성탄절. 나는 생애 처음으로 급체했다. 주말까지 씬리스트 40개를 써야 했는데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약도 소용없고 회사도 출근 못 하고 내내 쉬다가 토요일에 부랴부랴 씬리스트를 써서 보냈다.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첫 주에 일정상 못 하겠다는 사람이 발생해서 나까지 그만두겠다는 말을 또 차마 하지 못 해서 꾸역꾸역 쓰게 됐다.
일주일이 지나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고 너무 아팠다. 밤에 끙끙 앓았다. 대본이고 뭐고 쓸 정신이 아니었다. 12월 말일까지 그냥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컨디션이 올라와서 2025년 1월 1,2,3일 출근하지 않고 새벽 내내 썼다. 그렇게 초고가 완성되었고 교수님과 1:1 줌 피드백을 진행했다.
대본 초고를 완성할 때 3일 내내 밤을 새우고 낮에 잠깐 자는 식이었는데 얼마나 재밌던지 소설이나 에세이, 시를 쓸 때와는 다른 매력과 재미가 있었다. 쓸수록 캐릭터들이 자리 잡혀가는 것이 느껴졌고 점점 캐릭터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교수님과 ZOOM 피드백을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1시간 내내 웃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이디어가 골 때리면서도 신박하고 교수님께서 공모전에 냈던 작품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너무 재밌는 거다. 내 이야기가 더 생생하고 풍성해지도록 여러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셨고 그게 너무 재밌어서 얼른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교수님의 가장 중요한 피드백은 주인공 빼고 다 재밌다.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기만 하다. 별로 결핍도 없고 주인공이 민폐 캐릭터다. 주인공에게 모든 고난을 몰아줘라.
맞다. 쓰면서도 이상하게 주인공 성격만 갈피를 못 잡고 왔다 갔다 했다. 주인공 대사만 쓰면 착착 붙는 느낌이 없고 뭔가 재미도 없고 내숭떨고 있는 느낌 같았달까. 대사를 쓸 때 지금까지는 캐릭터 입장에서 상상하며 썼는데 이후로는 나였으면 어떻게 말했을지 고민하면서 썼다.
그 아이디어를 다 반영하려니 새로 쓰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감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씬리스트를 작성해서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한 시간에 한 줄도 채 적지 못하고 이야기 구조를 다시 짜다가 이틀을 날려 먹고 이러다간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교수님께 도움을 구했다.
"교수님, 줌 피드백 이후에 수정해 보려고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처음 쓰는 것보다 더 막막해져 버렸습니다. 일단 주인공을 딸로 바꿔서 이야기를 다시 쓰고 씬 3까지 썼는데 그 이후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아 길을 잃은 느낌입니다. 제가 기존에 썼던 이야기에서 너무 바뀌니까 아예 새로 쓰는 것 같은데 이럴 땐 뭐부터 정리해야 진도가 나갈까요...?"
"이럴 땐 진도가 많이 나갔던 대본을 고쳐야죠. 사실 전....예상했었는데...저도 그랬거든요. 지금은 엔딩까지 거의 다 나왔던 대본에서 씬을 정리하고, 위치를 바꿔보면서 주인공 이수만 생각하면서 수정하면서 완고 내시면 좋겠어요. 물론 제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답변 이후로 3일간 다시 썼다.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못 쓰겠다는 말이 목젖을 치고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님아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오. 내 입으로 그 말만은 하지 말자. 시간이 지나면 완성하고 홀가분해진 내가 있을 거라 믿으며 버텼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아시고서는 단톡방에 교수님 메시지가 올라왔다.
"아직 다 쓰지 못했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마감 앞두고는 초인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린 아직 힘들면 안 됩니다. 저도 지칠 땐 이런 영상을 봅니다"
그리고 첨부된 영상 하나.
[평창 2018] 넘어져도 1위, 넘어져도 올림픽 신기록! 최강 쇼트트랙 여자 계주팀]
다시 썼다. 그리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은 함께 공모전 대비반 하면서 쓰고 있는 학우들이었다. 교수님, 메일로 파일 보내드렸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렸습니다. 이 메시지가 올라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큰 자극이 되었다. 내 글쓰기의 원동력은 억울함이다!
대본을 쓸 때는 거의 밤을 새웠고, 회사에서는 일이 많아 야근하고. 눈은 너무 침침하고 몸은 너무 피곤했다. 새벽 3시, 4시, 5시, 7시.. 쓰면서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고 잠깐 눈 붙이고 잤다가 9시 20분에 일어나서 한 번은 회사에 지각했다.
마지막 피드백을 받은 날, 교수님께서 세 군데에 제출하라고 하셨다. 교수님께서 필요 없는 씬을 삭제하실 것을 생각하고 단막 분량보다 훨씬 많이 썼었는데 전략을 새롭게 짜서 지금부터 이틀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2부작 한 편과 단막 한 편, 두 개의 원고를 만들라고 하셨다. 회사에서는 회사 일로 마감, 마감... 집에서는 대본 마감, 마감... 휴가도 쓸 수 없었기에 월요일 집에서 꼬박 밤을 새워서 두 개의 원고를 만들었다. 접수 마지막 날이 수, 목요일이었고 기획안을 쓰려면 월요일엔 대본이 무조건 완성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대본 두 개를 완성했고, 화요일은 기획안을 마무리하고, 수요일에 SBS, 오펜, JTBC 세 군데에 모두 제출 완료했다. 아, 이 기분 어떻게 설명하지. 제출만으로도 당선된 기분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써본 적이 있나. 이렇게 많이 써본 적이 있나. 내가 쓴 게 맞나. 이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지. 내 스스로 너무 기특하다.
어느 순간부터 1월은 조금 울적하고 우울했는데 그런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보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느낄 틈도 없이 쓰고 쓰고 또 썼다. 매번 문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섰던 큰 문턱을 하나 넘어온 기분이다. 이 경험 덕분에 미래의 나는 좀 더 용기 있게 뭐든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 낸 나를 믿고 미래의 내가 또 해낼 것이다.
지금 이 기분, 이 느낌 그대로 남기려고 생각나는 대로 퇴고 없이 막 썼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함께 공모전 마감까지 달려와 준 우리 2025 대비반 학우님들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