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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Jan 31. 2023

남자친구의 생일을 못 챙긴 이유

 친구에게 줄 생일선물로 그녀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느낌대로 나름 정성껏 그려 말리고 있는데, 지나가며 보던 아들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그림이 좀 무서운데.”


 “어떤 게 무서워?”


 “그냥 색깔이랑 분위기가...”


 그러더니 제 방으로 총총 떠나는 아들. 약 세 시간 집중해서 그린 작품이 무섭다고 평가받으니 약간 허탈해져서 붓을 놓았다. 잠깐 고민 끝에 사진을 찍어 남자친구에게 보냈다. 


 [승오가 이거 보고 무섭대. 친구 선물 줄 건데, 진짜 별로야?]


 답장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매만지고 있다 보니 곧 남자친구의 생일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작년에 그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열심히 사진첩을 뒤적여 작년 이맘때의 케이크 사진을 찾아냈다. 사진을 보니 그냥 간단히 케이크에 초 꼽아 노래 부르고 지나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의 생일을 챙긴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총 연애 기간이 5년을 향해 가는데 한 번도 제대로 그의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연애를 시작할 당시엔 아이의 생일조차 챙길 정신이 없을 정도로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한 연애라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매일을 보냈다. 나 자신의 재활, 그리고 아이의 심리 치료로 무척 바빴던 기억이 난다. 늘 뒷전에 밀려나있던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건 연애 2년차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연애 2년차, 문득 그의 생일 날짜가 궁금해져서 묻는 나에게, 그는 두 달 전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이미 지나버린 생일이지만 원하는 게 없냐 묻자, 전혀 없다며 맛있는 밥이나 먹자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와 남자친구, 그리고 나 세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외식을 하고 돌아왔다. 생일이라 하기에는 특별함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연애 3년차에 접어들어 맞은 그의 생일날, 무척 충격적인 일이 있었기에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따라 일찍 퇴근한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일찍 퇴근했어?”


 그렇다... 나는 그의 생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을 떠올리면 몸서리치게 끔찍한 기분이 되곤 한다. 어떻게 생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지! 그러나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내가 생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조용히 미소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보여주었다.


 “...그냥 일찍 왔지. 회사에서 이거 받았어.”


 “회사에서 너한테 케이크를 왜 줘?”


 ...그래,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나는 남자친구의 생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고, 따라서 케이크를 보고도 아리송한 얼굴로 바보 같은 질문이나 해댔던 것이다.


 “그러게. 케이크 같이 먹을래?”


 “어, 그러자.”


 “와~ 삼촌 웬 케이크야? 맛있겠다!”


 우리는 왁자지껄 떠들며 맛있게 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가 절반 이상 줄어들고서야 나는 불현 듯 ‘생일’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고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설마, 아니 잠깐! 야. 잠깐만. 너 설마...”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했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으로 토해내듯 말했다.


 “야, 너... 그러고 보니 오늘 생일이었구나. 아니, 작년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진짜 미안. 내가 머리가 나빠... 아니다, 그냥... 미안하다.”


 “하하 괜찮아, 잊을 수도 있지.”


 “괜찮다고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 숨도 쉬기 싫으니까...”


 “엄마, 오늘 삼촌 생일이야?”


 그렇게... 다 파헤쳐진 케이크를 앞에 두고 급하게 초를 꼽아 어설프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식초에 절여진 양배추처럼 완전히 늘어졌다. 생일이라니, 생일이었구나... 어떻게 3년 사귄 남자친구 생일을 잊을 수가 있는지... 


 이건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아닐까. 적어도 달력에 표시해두고 기억하려는 노력은 했어야 했다. 자책하면 뭘 하나 이미 케이크는 날아갔고, 생일도 끝나 가는데. 나는 그에게 거듭 사과하며, 다음번 생일은 꼭 잘 챙기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연애 4년차엔 남자친구의 생일 1달 전부터 인터넷을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검색 키워드는 남자친구 생일, 남편 생일, 친구 생일선물... 다양한 추천 상품들이 나왔다. 나는 하나, 하나 꼼꼼히 들여다보며 이걸 선물하면 어떨까, 저걸 선물하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선 지갑, 그는 카드조차 들고 다니길 거부하며 휴대폰 어플로 결제하는 사람이니 싫어할 것 같다. 지포라이터, 비흡연자에게 불필요한 선물이다. 고급 와인, 맥주 한 모금만 먹어도 얼굴이 새빨개지고 알콜을 싫어하는 그에게는 최악의 선물이다. 용돈? 우리 사이에 돈을 주고받는 거 좀 이상하지 않나... 


 우리의 평소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달력이나 사진첩 같은걸 제작해볼까 싶었는데, 둘 곳이 애매했다. 그의 집에 두라고 하기엔 부모님이 나에 대해 모르고 계시고, 회사에 두라고 하기엔 “너 애 딸린 여자랑 연애하냐”이런 소리 들을까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아이를 뺀 사진만 가지고 만들자니 그건 더더욱 이상했다. 어딜 가든 우린 셋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마치 친한 친구 셋이 있는데, 둘이서 한 명만 따돌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장고 끝에 깔끔한 이불 세트를 구입했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 그의 집에는 침대가 없어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잔다고 들었는데, 지난번에 얼핏 봤던 그의 방 사진에 있던 낡은 이불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래 쓴 베개는 버리고 새로 사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의 베개는 10년도 더 된거라 빨리 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새 베개도 샀다. 케이크도 잊지 않고 사와서 같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포장에 실패한 거대한 선물증정식도 하였다. 삼촌의 예쁜 새 이불을 질투하는 아들 때문에 결국 같은 디자인의 이불을 하나 더 사는 헤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보냈던 것 같다.


 곧 그의 생일이 다시 돌아온다. 나는 회상을 멈추고 휴대폰을 켜서 ‘생일 선물’에 관한 검색을 시작했다. 결과는 작년이나 올해나 비슷했다. 술, 라이터, 방향제, 지갑, 용돈 등등... 올해는 어떤 선물을 주는 게 좋을까? 


 지잉-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데 남자친구의 답장이 왔다.


 [그림 예쁘기만 한데 왜. 다음엔 친구 말고 승오랑 너 그려봐.]


 나랑 승오를 그리라니, 그릴거면 셋 다 그려야지 무슨, 그러면서 킥킥 웃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사진이라면 몰라도, 그림은 괜찮지 않을까. 남자친구와 나, 그리고 아이 셋이 함께했던 즐거웠던 한 때를 그림으로 그려서 선물하면 어떨까. 얼굴을 잘 안보이게 그리면, 그의 집에 둬도 괜찮지 않을까.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셋이서 식사를 하고, 승오가 그린 그림, 또 내가 그린 그림을 선물로 건네는 모습을 상상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나는 적당한 크기의 캔버스를 찾아 빠르게 창고로 향했다. 뭘 그릴까 고민하는 내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얼굴엔 미소가 만개했다. 소중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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