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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Nov 18. 2024

볼이 차가워지면.

"그니까 나라야, 니도 한 번 니 아버지한테 전화 드려봐, 잉!"


수화기 너머로 이모의 당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성의없이 그러마고 대답하며 계속 발을 옮겼다. 아버지에게 전화 할 생각이 없는 내 마음을 알아챈건지, 이모의 당부는 한동안 계속 되었다. 나는 약속시간에 늦은 사람처럼 급하게 걸었다. 금세 숨이 찼다. 찬 바람에 수화기를 든 손 끝이 에는듯 저렸다. 저 멀리 길 끝에 새파란 가을하늘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하늘을 향해 걷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이모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라야, 니 할무니 기억 나나? 외할무니 있다아니가. 할무니가 니 엄마랑 싸워가꼬 혼자 나와계시다데. 나도 겨레한테 지나가듯 들은 말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할머니요?"


외할머니.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주름진 손등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손가락 마디마디 툭 튀어나와 늙은 노인의 손등. 비교적 흰 편인 얼굴과 대비되는 새카만 손등. 때가 낀 것 마냥 씻고 나서도 지저분한 그 손등 말이다. 할머니는 그 낡은 손으로 연신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 아이고 내 새끼. 까자 무그까? 응? 할매랑 까자 무그까나?


"이모 할머니 연락처 알아요?"


모른다고 몇 번을 잡아떼는 이모를 다그쳐 결국 번호를 알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일련의 숫자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넣고 전화를 끊었다. 수술 수 중환자실에서 얼마전 퇴원했다는 아버지 소식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할머니 소식 한 자락에 이토록 마음이 에는지 알 길이 없다. 싸늘해진 손끝을 주머니에 숨기며 공원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랑 내가 친했던가? 


두 손을 맞잡고 비비자 얼었던 손가락이 녹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내가 한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공원 구석에 비질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파란 하늘을 무대삼아 연극을 선보이는것 같았다. 연극 제목은 할머니의 인생. 주인공은 어린 나이 시집가서 갖은 고생은 다 하고, 알콜중독에 빠진 남편 대신 가장이 된다. 술독에 빠진 남편의 급사 후 열심히 돈 벌어 애들 다 키워 결혼시키고 귀여운 손주까지 본다. 손주들 중 하나가 제일 먼저 결혼한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결혼한 손주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친정과 인연을 끊고 지내기까지 나름 힘든 시간을 홀로 이겨냈다. 할머니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할머니는 뭐, 엄마랑 둘이 알아서 살겠지 싶었다. 매일 아침 싸우고,점심 때 화해했다가 다시 또 싸우고, 저녁때 화해 비스무리한걸 했다가 다음날 눈 뜨자마자 싸우는 일상이라고 해도. 그래도 가족인데 별 일 있겠나 싶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니.


휴대폰을 불쑥 들어올렸다. 방금 이모가 불러준 숫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손가락을 올리고 잠시 기다리자 블록이 잡히면서 복하사기/전화하기 창이 떴다. 전화를 해 볼까 잠시 고민하다 화면을 꺼버렸다. 손등으로 찬 코끝을 슥슥 문댔다. 저 멀리 청소하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있는 관객이 된 것 같았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발치에 낙엽이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문득 혼자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서글퍼졌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다 큰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 십 대의 말, 그 때 나는 타국으로 보내졌다. 아니, 보내진것은 아니다. 이혼후 갱년기로 힘들어하던 엄마 곁에서 계속 시달리다가, 아버지라는 선택지를 고른것은 나였다. 그러니 어찌보면 타국으로  보내진 게 아니라 자원해서 한국을 떠난 것에 가깝긴 했다. 한 살 어린 동생도 날 따라 왔다. 외국 생활은 한국 생활보다 어떤 면에서 낫고 어떤 면에서 더 힘들었다. 우리에게 집착하여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괴롭히는 이가 없어서 편했지만, 우린 정 반대의 이유로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 보듯 했다. 


하굣길에 오토바이에 치여 울면서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나를 노려봤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내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다리 여럿 난 벌레로 변한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그런 눈으로 쳐다볼 수 있을까? 우린 한 가족, 아니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 아니 그 모든걸 떠나 같은 인간 종족인데. 아버지는 아프면 병원에 가든가 할 일이지 의사도 아닌 자신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의도가 뭐냐며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어린 십 대 어린애였고, 외국에 온 지 일년도 안 되었고, 그 나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그런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주고, 의사의 말을 번역해준건 이모였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이모는 지금 아버지와 정식으로 혼인신고 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든 저렇든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나를 남보듯 하는 아버지와, 사랑하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해 어쩔줄 몰라하는 엄마와 아예 인연을 끊었다. 아버지가 수술해서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아버지는 십 대 어린애도 아니고, 나보다 돈도 많고, 한국 병원에 입원해서 한국말도 잘 하는데. 이모도 있고 친구들도 많은데. 게다가 내가 그를 피하는 이유는 단지 한 두가지의 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모든 일들로 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은 그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소식을 들을 때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질 뿐.


어쨌든 진짜 남인 이모랑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런 내게, 이모가 외할머니 소식을 전한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어떤 사이였더라? 아주 어렸을 적, 할머니가 엄마 몰래 과자를 쥐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과자나 사탕, 아이스크림 같은것들을 몰래 많이도 얻어먹었다.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업어달라며 떼 썼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한번도 안 된다고 한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나를 떼쟁이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랑까진 모르겠지만 무한한 노력이 분명 있었다. 그것은 결단코 시간이 지난다고 바래질 수 있는 그런 노력이 아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운동화에 낙엽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건조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화하기]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울렸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과 함께 불안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신발장에 쌓여있는 고지서, 지난 달 휴대폰 요금, 텅 빈 냉장고와 다달이 줄어드는 급여 명세서 같은 것들, 보일러를 켤까 말까 고민했던 밤과 이혼 후 늘 신는 구멍난 운동화, 휴대폰을 들지 않은쪽 손을 들여다 보자 손톱 가득한 거스러미와 너덜거리는 소매 같은것들이 모두 불안이 되어 귓가를 파고 든다. 형태 없는 불안이 야금야금 머리와 마음에 퍼진다. 다시 한 번 발을 움직이자 건조한 이파리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내 마음은 왜 이토록 건조할까. 마음에 사랑이 없어. 분명 받은 적 있을텐데 어느샌가 수증기처럼 날아가 몽땅 말라버렸다. 


혼자 있을 할머니가 걱정되어 전화를 하고 있지만, 혹시나 같이 살자고 할 까봐 겁도 났다. 만약 그러시면 나는 뭐라고 말하지. 할머니 저 돈 없어요. 애도 키워야 하고요. 제가 어떻게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요. 마음 한 구석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를 버린 건 엄만데, 왜 내가 그걸 책임져야 해? 애는 내가 낳았으니 이혼 후 책임진다지만, 할머니는? 할머니도 내 책임이야? 어렸을 적, 몇 번 업어줬다고 남은 내 인생 저당잡혀 살기까지 해야 하는거야?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며 훌쩍거렸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면 나만 손해다. 이렇게 쌀쌀한 가을 날씨에 눈물까지 흘려버리면. 그러면 눈물 때문에 볼이 차가워지잖아. 볼이 차가워지면, 마음까지 차가워질거잖아. 이미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울고 싶지는 앞아. 내 인생은, 이렇게 메마른걸로 충분했다. 마른건 내 탓이 아니니까. 하지만 차가워지면 그건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것 같아서, 싫었다.


바로 그 때, 휴대폰이 우웅 하고 울렸다.


액정에 모르는 숫자가 써져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방금 전화했던 외할머니 번호였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손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춥다. 말라붙은 내 인생에 따듯한 것은 이제 없어. 하지만 문득, 과자를 내밀던 할머니의 손이 눈앞에 떠올랐다. 할매랑 까자 하나 무그까? 하던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것 같았다. 주름 가득한 할머니 손은 늘 따듯했다.


모시고 살 자신은 없지만, 한 번 업어드릴수는 있지 않을까? 외롭고 쓸쓸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내밀어준 따듯한 온기에 대한 대가로. 한번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이 절로 움직였다. 가을 바람에 얼어붙은 손가락이 초록색 전화 그림을 터치했다. 한 번 업어드리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싫어하실테니 과일이라도 좀 사다 드리고. 같이 과자도 먹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낙엽처럼 비쩍 마른 가슴이지만. 아버지를 닮은 냉정한 눈빛이지만. 따듯한 행동 한가지는 할 수 있잖아. 마침 쌀쌀한 가을이니까. 할머니 손 한번은 잡아줄 수도 있잖아.


- 할머니 저 나라에요. 저 기억나세요?


마음을 가다듬고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말했다. 수화기 넘어 뭐라꼬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할머니 목소리다.


- 할머니 저 나라라구요. 나라. 할머니 손주 나라에요.


짧은 침묵 뒤 고함처럼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라? 니 나라가? 아이고 나라야 나라야! 니 할미 손주 나라 맞나! 절절 끓는 용암처럼 뜨거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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