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가끔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을 보면 내가 아이를 키운 흔적이 보인다. 예쁜 드레스와 세일러 문 머리띠에 공주 미소를 띤 사진 따윈 없다. 짧은 커트 머리에 동네 시장에서 산 바지, 신발. 빨아 입히기 쉬운 소재의 옷을 입은 꼬맹이가 수줍게 웃고 있다. 남에게 물려줄 만한 아까운 옷 하나 없다. 그나마 나의 이런 무심함에 어머니가 나서서 이런저런 입성을 챙긴 것이 이 정도였다.
한참 자라고 나서 자신의 입성 수준을 눈치챈 아이가 볼 맨 소리를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나를 아무렇게나 키웠어? 이쁜 옷도 못 입어보고, 이게 뭐야? 남자처럼, 창피하게! ”
육아 독박을 해 주신 친정어머니와 가사 분담을 해준 남편 덕에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흔히들 엄마 숙제라고 하는 초등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는 것은 짐짓 무심했다. 과제를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사교육도 뒤늦게 따라가는 편이었다. 급기야 뒤처짐을 걱정하신 어머니가 어느 날 ‘XX펜’과 ‘X선생 영어’를 불러들였다. 그러다 보니 초등 때 아이는 학급에서 조용하고 평범했다. 게다가 딸 가진 엄마들의 아이 꾸미기도 없었으니 외려 주위에서 걱정을 했다. 아이 기죽는다고.
어머니와 꽉 붙어 사느라 이사도 자주 했고 아이는 3곳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극적인 아이는 그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마지막 전학을 앞두고 아이는 바뀌는 학교와 또 한 번의 친구 사귀기에 자신 없어하며 울먹였다.
나는 아이에게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 역시 3번의 전학을 하였고 그때마다 이미지를 초기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즐겼다. 새로운 학교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니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새로 태어 날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어떤 아이로 새로 태어나고 싶으냐고.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간 학교에서 아이는 변신에 성공했다.
6학년 첫 시험을 앞둔 때였다. 아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번 시험을 위해 인생 최대의 노력을 해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자고 했다. 그 시험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상위권에 진입했다. 한 번의 성공을 맛본 아이는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푸닥거리는 있었다. 6학년 말이 되자 이것저것 학원수가 늘어났고 숙제를 안 해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나는 모든 학원과 학습지를 중단했다. 아이는 뒤쳐지는 불안감을 스스로 견디지 못했고 석 달만에 몰래 학원을 원상 복귀시켰다. 할머니에게는 나중에 학원비를 꼭 갚겠다고 약속했단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중2 때였다. 반항의 시절이었다. 저녁에 퇴근을 하면 나의 화장품들이 제자리를 이탈해 있었다. 어쩌다 일찍 퇴근하던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왠지 낮 익은 여학생이 마주 오고 있었다. 마스카라를 떡칠한 그녀가 나의 아이임을 알아차리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종종 학원도 빼먹는다는 사실도 들려왔다.
나는 다시 아이를 마주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다. 당시 동방신기 그룹에 푹 빠져 있던 아이는 백댄서가 꿈이라 했다. 학원을 몇 개 정리하고 주말마다 댄스 학원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 생활은 한 달도 안 되어 끝났다. 몇 번의 교습 후 기가 죽은 아이는 자신은 춤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 포기했다.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아이는 별 수 없이 책상에 다시 앉았다. 나는 공부는 차선의 선택이고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언제든지 다시 하자 말했다. 그 뒤로 아이는 간혹 분출하는 에너지를 쏟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지지해주는 준비와 시스템이 부족했다. 부모로서 나 또한 그런 면에서 깨어 있거나 앞서 가질 못했다. 결국 공부였다.
워킹맘에 교육열, 아니 학원 열이 부족한 엄마를 둔 탓에 아이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들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는 워킹맘을 대신해 아이는 그룹과외에 끼기 위해 사교성을 키워갔다. 아이가 정보를 얻고 내게 요청하면 과외비를 송금하였다. 이후 아이는 대입을 위한 길고 험난한 정글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갔다. 엄마의 정보수집 부분도 스스로 감당하면서 말이다. 대입에 성공한 후 툭 던진 아이의 말에서 그 고단함이 배어 나왔다. 나는 잡초처럼 컸다고.
아이는 지나치게 독립적이 되었다. 문과를 선택한 것도 뒤늦게 알았다. 가고 싶은 대학도 홀로 선택했다. 고2 때 이미 그 대학을 다녀왔고 고3 시작하자 입학식 날 다시 그 대학을 다녀왔다 한다. 혼잡한 입학식 날 기쁨과 축하로 떠들썩한 교정을 바라보며 아이는 무엇을 상상했을까?
고교 생활 내내 그 대학의 로고가 새겨진 공책, 열쇠고리, 책갈피 등이 방안에 넓려 져 있었다. 컴퓨터 상단에 ‘가자 xx대학교’가 붙어 있었고, 로그인 ID도 그 학교 이름이었다. 아이는 내내 그 학교에 입학하여 생활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며 다녔다.
대학 원서 쓸 무렵 다른 대학으로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아이는 확고했다. 아차! 고등학교 입학하며 건네준 책 ‘시크릿’의 영향이 작용했음을 후에 알았다. 그 책의 핵심인 열망하는 것에 대한 끌어당김, 시각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고3 여름 어느 날 입시정보가 부족한 것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틀을 휴가 내고 대학입시 전형을 열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뿔싸! 수시입학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종류가 많은지는 몰랐다. 더구나 수시 준비는 최소 1,2년 전에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엄마의 무지가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운명을 가른다는 데! 다급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태연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정시에 집중했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결정해 갔다. 엄마의 선제적인 정보를 기대할 수 없었고, 요청을 하면 수용하되 과정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몇 차례 경험했기에 스스로 찾아 요청했고, 요청한 것은 열심히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이와 의논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등록금과 차비 이외에는 스스로 벌어서 충당하기로 했다. 멋 부리고 싶은 여학생이라 이것저것 사야 할 것도 많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돈도 적잖게 필요했다.
아이는 닥치는 대로 다양한 알바를 했다. 대학 내내 스펙 쌓기도 힘든데 알바를 한다 하니 나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좀 이상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돈을 벌고 돈의 가치를 경험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고, 시간은 사용하기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노느라 대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못한 딸아이는 졸업 즈음에 고시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알바와 시험 준비를 병행하기 힘드니 고시 기간 중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 요청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그 어려운 공부를, 그것도 한 해 몇 명 안 뽑는 시험에 모험을 걸다니. 주변의 고시 폐인이 떠올랐다. 실패한 아이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이는 몇 달 동안 울고 불고 하였다. 나중에는 당연히 해야 하는 재수도 안 했으니 그 비용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 스스로의 판단에 반대를 한 것이다. 아이의 꿈을 지원하기엔 나 자신이 불확실이 싫었다. 대기업 취업을 권했다. 그새 전투력과 투지를 갖춘 아이는 완강했다. 결국 내가 졌다. 2번 도전으로 합격할 것과 실패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투쟁으로 얻어낸 기회 앞에 아이는 약속을 지켰다.
공무원이 되고 월급을 받자 아이는 대번에 독립을 선언하고는 춤추듯 집을 떠났다. 고약한 엄마에게서 벗어남을 자축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정답은 없다. 자녀의 타고난 성향도 분명 존재한다. 각 가정의 상황도 다르다. 나도 초보 부모로서 실수도 많이 했고 이 땅의 교육 현실에 갈팡 질 팡하였다. 또한 다소 과한 신념으로 딸아이에게 모성애를 의심받기도 했다. 때론 과정을 책임 지우는 냉정함으로 원한(?)도 샀다. 딸은 종종 “나는 엄마의 부하직원이 아니야!” 라며 외치곤 했다.
대학에 들어가 교양과목으로 교육학을 들은 아이는 내게 항의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어릴 때 부모-자녀 관계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큰데 자기는 사랑 없는 엄마를 만나 성격 형성에 장애가 생겼다며 학교에서 진행하는 심리상담센터에 다녔다. 엄마인 나도 불려 갔다. 휴! 나름 최선을 다한 나는 분하고 억울했지만 수차례에 걸쳐 사과했다. 부모 되기 처음이었고 서툴렀다고, 완벽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딸의 말이 맞다. 나의 신념은 변치 않았지만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너무나 엄격하고 원칙적인 엄마였다. 신념과 원칙이 때론 사랑을 가렸다. 아이가 부모를 뛰어넘어 그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돌아간다면 내 마음속의 원칙을 아이의 성장에 맞추겠다. 사랑 안에서 단계적으로 지혜롭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부모가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주고 필요한 것을 눈앞에 대령 것으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자신 안의 빛나는 자원을 발견하고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가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왜곡된 투사일 뿐이다.
후배들이여! 있어도 풍족하게 키우지 말자. 부족함, 결핍은 아이가 스스로 방법을 궁리하고 결정하고, 주어진 기회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또한 거대한 진화론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필요한 것이 저절로 주어지는 풍족한 아이들은 무엇이 퇴화될까?
후배들이여! 부모로서 우리가 풍족하게 줘야 할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녀에게 바싹 붙어 있지 말고 좀 떨어져 지켜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남의 아이 대하듯 하자. 자녀가 사랑 안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책임지게 하자. 좀 부족하더라도 믿고 기다리자. 극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혹여 이 거친 세상에서 내 아이가 뒤쳐질까 하는 불안함과 그 조급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