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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배언니 Oct 09. 2024

죽음에 한 발 가까이

3) 허물어진 육체를 뚫고 나온 한 줄기 미소

노인전문병원에서 아로마림프 마사지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여 4명 내지 5명의 노인환자에게 마사지를 해드린다.

물론 혼자 하긴 어렵고 선임-신참이 짝을 이루어 도제식으로 진행한다. 

한 사람당 약 20분씩이다.


이제 4번째의 봉사를 경험하니 누가 누군지 구별이 되고 환자 개인이 보인다.

생초보일 때는 그저 내가 만져야 되는 한쪽 다리만 보였다면 이제는 노인들의 상태, 표정, 남녀구분, 나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가 등의 전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90% 이상의 노인환자들은 3가지 이상의 병명을 가지고 있다. 

3가지 중 하나가 알츠하아머와 치매증상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고 명료한 의식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봉사를 하러 병실을 들어가면 환자 나름의 특성이 보인다.


어제는 한 여성환자에게 마사지봉사를 하였다.

마사지 내내 깨어있었던 그 노인분은 자신의 근육을 통제하지 못했다.

특히 내가 맡은 한쪽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구부리고 뒤틀려지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는 바람에 마사지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 환자로부터  그날 큰 선물을 받았다.

마사지 전부터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는 노인.

옆에 있는 돌봄 간병인이 해석해 준다.

"감사해서, 고마워서 어떡하지요? 이렇게 받기만 하고 대접할 것이 없네요. 너무나 감사해요"

간병인의 해석을 들으니 환자의 웅얼거리는 말이 비로소 들렸다.

연신 감사의 말을 표현하면서 환자는 자꾸 떡을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마사지 중에는 봉사자들이 떡을 먹을 수 없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거듭해서 떡을 먹으라는

권유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마사지가 끝나고 우리는 봉사 중 환자가 권하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규칙을 깨고 환자가 가리키는 떡을 하나 입에 물고 환자가 우리의 먹는 모습을 볼 수 있게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노인의 일그러진 얼굴속에서 환한 미소를 보았다.

컴컴한 비구름 속에서 한 줄기 찬란한 햇살을 본 순간이랄까.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밀고 올라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끼며 그것을 표현하고 무언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으로 그 감사를 표현하려는  환자.

비록 몸은 의지대로 움직일 없으나 마음만은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표현하는 노인.

그에게서 큰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아! 역시 어떤 장애물도, 육체의 구속도 인간의 의지와 마음은 묶어두지 못하는구나.

빅터 플랭클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불쑥 생각난다. 


이래서 봉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환자들에게서 배우고 감동받는구나 싶다.

점심식사를 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우리는 일부러 맛있게 , 소리 나게 냠냠 떡을 먹고는

한 개 더 권하며 허공에 손짓을 하는 환자의 손을 꼭 잡아주고 인사하며 물러나왔다. 

감사합니다.  떡 맛있게 먹었네요.  다음 주에 또 뵐게요.


보수도 없는 자원봉사, 여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매주 달려오는 봉사자들, 그것도 근 10년 가까이 중단 없이 행하는 봉사자를 보니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을 오늘 본 것 같다.

나도 10년은 일단 해 봐야지.

무언가를 시작할 때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그저 포기 없이 중단 없이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일에 대한 앎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는 처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한 사람을 목격하고 간다. 


나의 늙음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올까?

육체적으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미약하더라도

정신만은, 의지만은 지키고 늙어갈 수 있을까?

오늘 만난 일그러졌으나 아름다운 웃음을 보여준 노인처럼 말이다.


아니면 육체의 곳곳을 파고드는 쇠퇴, 상실 앞에서 많은 이들처럼 무너져 버릴까?

사람이기보다 식물인간에 가까운 다른 노인들을 둘러본다.

생각하기를, 표현하기를 멈춘 이들에게 지금의 삶은 무엇일까?

나머지 삶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삶을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최근 호주 의사가 오랫동안 개발하여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죽음캡슐'에 대한 논쟁기사가 한창이다.

조력사에 가장 앞서가는 스위스가 이 캡슐을 사용하는데 

신청자가 꽤 많은가 보다. 

원리는 간단하다. 

영화에서 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캡슐에 질소의 농도를 높여 5분 만에 사망하게 하는 것이다.

질소의 삽입 버튼을 본인이 직접 누르고 캡슐의 문을 닫고 기다리면 질소의 농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끝내 사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고통보다 편안함을 느끼고 황홀한 감정도 느끼게 된단다.


스위스의 조력사에 비해 가격도 매우 저렴하단다.

수백 명이 캡슐사망을 신청했고 이제 겨우 60대 여성이 실행하여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갑자기 스위스 정부에서 이를 금지시켰다. 

죽음의 방식에 열려있는 스위스가 캡슐사용을 금지시켰으니 다른 국가에서 시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당초에 조력사를 가장 먼저 허용한 네덜란드의 단체에서 의뢰하여 개발한 것이란다.


존엄한 죽음.

의미를 퇴색한 삶.

여기에 윤리적인 잣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삶을 끝내고 싶은 한 인간의 의지,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육체를 포기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의 절규,

아니 그런 의지와 생각조차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무력감과 절망, 

또한 경제적인 부담, 사회적인 비용.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 그렇게 금기시되고 용납할 수 없는 권리일까?

누가 타인의 죽음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반가운 소식은

기대수명이 늘어난 지금의 사회에서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 가까이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겠지 기대한다. 

나는 내 죽음을 완전하게 선택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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