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은 19세기 프랑스 화가로서 반 고흐와 함께 자주 비교되는 화가이다.
개인적으로 반 고흐를 좋아하고 폴 고갱을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여자라곤 거의 관심이 없었고 '결핍'과 '외로움'을 가진 자신의 부족한 자아를 예술로 '승화' 하려했던 반 고흐와 여러가지 이유와 욕심으로 시작된 '화가'의 삶을 오로지 본능과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고향을 떠나 그가 생각한 원시의 섬으로 떠난 폴 고갱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원시주의와 종합주의적 화풍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폴 고갱은 정말 위대한 화가일 것 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페루계 민족주의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페루에서 생활을 했던 폴 고갱은 이러한 배경 때문에 '섬', '남쪽나라' , '무인도', '원시섬' 같은 곳에 관심이 많았다.
20대때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도선사의 직업을 가졌을 때도 배를 타고 이 곳, 저 곳을 누비고 다니길 좋아했고증권사 직원으로 부자가 되어 결혼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했을 때에도 그는 틈틈이 배를 타고 프랑스의 식민지 섬들을 다니곤 했다.
1886년, 잘 다니던 증권사를 그만둔 후 그는 미술전에 출품했으나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점묘법의 대가 '조르주 쇠라'에 밀려 입상이 좌절되고 만다. 당시 폴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를 존경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을 그렸기 때문에 점묘법의 대가인 쇠라의 작품들가는 차이가 있었다.
실망한 폴 고갱은 1887년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마르티니크'에 체류하게 된다.
이 곳에서 총 11점의 작품들을 그리게 되는데 특히 인도인들의 힌두교 상징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고갱의 마르티니크에서 완성된 11점의 작품들은 프랑스의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되었고 이 전시회를 통해 반 고흐의 동생 '테오' 에게 고갱의 3개의 작품이 팔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갱과 고흐는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 유명한 프랑스의 남쪽 도시 고흐의 노란 작업실이 있는 '아를'로 가게 된다.
1888년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역사적 만남(?)은 약 9주 동안 진행되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고갱은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짐을 싸고 나왔다. 사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도 폴 고갱의 방문을 학수고대 기다렸던 반 고흐가 친구의 침실 방을 꾸미기 위해 환영의 의미로 그렸다고 한다.
예전에 파리에서 조우했던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첫 만남 때 '해바라기'를 몹시 좋아했던 폴 고갱의 모습을 보고 해바라기를 그렸다고 하니 당시 고흐가 얼마나 고갱을 기다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두 사람의 짧은 9주간의 만남 동안 무슨 일이 있어서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폴 고갱보다는 반 고흐를 좋아하다보니 고갱의 비매너(?)적인 행동들이 당시 예민했던 반 고흐의 성정과 안맞아서 갈등이 생겼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듬해인 1889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이 박람회에서는 프랑스의 국가적 대외용 '과시'를 위한 당시 프랑스가 소유했던 식민지 국가들의 풍습과 인종들을 소개(?)하고 전시하던 '식민지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여러 원시부족들의 옷차림과 백인과는 다른 생김새를 보고 '원시주의', '이국주의'에 눈뜬 폴 고갱은 1891년 2년간의 고심끝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내가 그곳(타히티)에서 하고 싶은 일은 열대의 작업실을 발견하는 것
이 글은 1890년 폴 고갱의 편지중에 한 대목이다.
이미 그의 조국 파리에서는 빛과 풍경에 심취된 인상주의가 쇠라, 모네, 등의 화가로 인해 대유행 중이었고 파리 만국박람회의 식민지관을 통해 사람들이 원시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판단했던 고갱은 아예 원시섬으로 들어가 그들의 문화를 보고 자신의 그림에 옮기고자 떠났던 것이다.
어릴 적 외가 페루에서 보고 느낀 섬생활과 원시부족, 남쪽 나라에 대한 동경,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관심은 결국 타히티행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20세기 전후 유럽 미술 운동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기도 한다. 타히티는 유럽인들에게 '지상낙원',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고향으로 인식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곳 '키테라' 가 바로 '타히티'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무렵에는 파리만국박람회의 인기뿐만 아니라 여행소설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 소설은 바로 피에르 로티의 '로티의 결혼' 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타히티의 풍치와 관능을 묘사한 소설로서 미지의 세계 타히티에서 잠정적 환락을 구하는 멜랑꼴리한 시인의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인상기로 그 당시 파리 사회 전반적으로 유행했던 사조인 '탈(脫)근대문명', '멜랑꼴리(melancolie)'함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다.
그들(타히티인)에게 산다는 것은 단지 노래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 뿐
고갱이 1890년 자신의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 중에서 한 대목이다.
하지만 조국 프랑스를 떠나 69일간의 긴 항해 끝에 환상의 섬 타히티에 도착한 폴 고갱은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향과는 너무도 다른 타히티의 현실에 적잖은 실망을 하고 만다. 이유는 이미 타히티는 유럽인들의 잦은 왕래로 인해 원시섬의 모습이 아닌 근대문명화, 유럽식으로의 전환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곳 '키테라'의 섬처녀들이 유럽복식차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막상 와보니 식민지타이틀만 남은 타히티의 현실을 보고 많은 실망을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폴 고갱은 본인 스스로 직접 이상향, 지상낙원, 천국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왼쪽 작품은 당시 유명한 사진작가였던 샤를 스피츠 (charles georges spitz)의 사진 작품이고 오른쪽 작품은 폴 고갱의 작품이다. 왼쪽 사진을 보고 폴 고갱이 따라 그렸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숲 속에 숨겨진 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작품 제목은 타히티 언어로 ' Pape Moe', 영어로는 'Mysterious Water' 이다.
사실 당시에 살던 원주민들은 저렇게 하반신만 입고 산에서 물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며 사진을 좀더 자세히 보면 물이 나오는 입구에 파이프로 동그란 관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 조차 '연출된 사진' 이었던 것이다.
천국같은 곳을 직접 그림으로 표현하고 '원시주의'의 창시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싶었던 폴 고갱은 이후에도 샤를 스피츠의 사진 작품들을 보고 많은 작품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왼쪽의 사진은 타히티 도착 후 그가 결혼한 14세(만 13세)의 첫 부인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폴 고갱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인 미성년자 간음(?)죄 인데
당시 타히티의 섬 처녀들중에서도 13-14세가 된 소녀들만을 데려와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 찍어놓은 샤를 스피츠의 사진들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그린 후 그는 원시주의와 이국주의에 빠져있던 유럽인들에게 작품을 팔게 된다. 사실 예전에 폴 고갱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의 이런 이기주의(?)에 적잖이 실망을 했는데 예술사 공부를 하면서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처음엔 이처럼 모방을 하면서 배우게 되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데 모방은 필요조건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말이 실감이 되는 부분이다.
고갱의 첫 타히티 방문시 그는 44세였다. 13세의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6학년 아이와 결혼한 고갱은 프랑스의 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한 것도 아니어서 중죄에 해당할 뿐만아니라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국이라면 중형을 선고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유럽 남성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성적 방종은 불문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고갱은 타히티로 갈 당시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는데 19세기인 당시로서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었다. 그러나 고갱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가진 것이다.
고갱은 13살의 아내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렸다. 이 작품은 첫 아내가 아이를 유산한 후 슬픔에 잠겨 누워있을 당시의 모습인데 이런 고통을 혼자 당했을 원주민 아내를 고갱은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을 팔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가 예상한 것 보다 성과가 좋지 못했고 정리하지 못했던 프랑스 아내와 다섯아이와의 결혼생활을 정리한 후 1895년 6월,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지에서 죽게 된다.
폴 고갱의 작품 중 '타히티의 여인들' 말고 유명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원시주의의 창시자로서 그가 평생을 무척이나 동경해왔던 유토피아이자 이상향, 지상낙원, 천국인 ' 타히티'의 모습을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처럼 연출한 작품인데 이 작품 마저도 아래 작품을 모방한 작품이다. 이미 수 년전에 나온 프랑스 선배 화가인 피에르 샤반느의 작품을 보고 그린 것이다. 작품의 구도적 배경이나 인물 들의 배치가 상당히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두번째 타히티 생활을 시작하며 고갱은 이웃집의 '파우라'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고갱을 만났을 때 열 네살이었다. 파우라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는 딸이었고 아기였을 때 죽었다. 둘째 아들은 파우라가 길렀다. 훗날 전기작가 메튜가 타이티를 방문했을 때에도 파우라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원시주의, 이상향을 찾던 고갱은 태평양의 한 가운데 있는 마르키즈 제도야말로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래의 식기와 무기를 쓰며 살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마르키즈에 도착하자마자 고갱은 그곳도 타이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유럽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게다가 마르키즈는 서양인들이 달고 들어온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 8만여 명이었던 주민은 고갱이 도착한 20세기 초에는 간신히 4천여 명이 남아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의 원주민들이 고통받아 죽었는지 알수 있다.
태평양에선 태풍이 잦았고 변변한 건물이 없는 원주민들은 자주 이재민이 되어 폴 고갱이 살고 있던 교회를 찾아왔다. 이런 와중에 또다시 원주민의 딸과 세번째 결혼(?)을 하게 된 고갱은 병은 그대로였지만 열네살 소녀였던 '배이호' 와의 사이에서 건강한 딸을 낳게 된다.하지만 수 년간 앓아왔던 매독, 토착병 등등의 고갱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고통을 덜기 위해 몰핀에 손을 대며 결국 중독되게 된다.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하였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예전에 나의 첫 직장 대표가 피부병을 고질적으로 앓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토피' 였던 것 같다. 대표는 추운 겨울만 되면 건조하지 않은 동남아시아 태국에 가서 몇 달씩 지내다가 오곤 했는데 그때는 그런 그가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늘 동경하여 마지않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좀 많은 편인데 프랑스의 파리가 그 중 하나이다.
파리를 생각하면 내가 사랑하는 수 많은 화가들이 떠오르고
파리의 밤거리를 거닐면 좋아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오늘 알아 본 폴 고갱의 이상향을 보면 이상향, 지상낙원이란 존재는
내 마음 속, 추억 속에서 지켜지고 보존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예술적 성취를 위해, 스스로의 욕심을 위해서만 찾는다면
그가 원하던 지상낙원의 모습은 결국 지상낙원이 아닌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지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더불어 진정한 '사랑' 의 의미도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그토록 주장하던 '리비도'는 과연 육체적 사랑 뿐인 것일까??
폴 고갱의 14세 어린 아내들의 명복을 함께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