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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Oct 04. 2021

불행은 꼬리를 문다.

한계가 없는 절망

남편은 나를 기만고 가족은 나를 불신했으 가장 힘든 순간에 나를 버렸다.

매일 죽을 것처럼 아픈 통증과 싸우며 십수 번씩 기절하고 뇌진탕과 타박상과 골절을 겪으며 기억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내가 제정신을 붙들 수만 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이 광풍처럼 밀어닥쳤다.

가족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설명하려 해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당신들을 속이려고 했다고 굳게 믿으셨고 내가 계속 아프다는 사실에 이젠 화를 내셨다. 동생은 그즈음 집을 장만해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 더 이상 내게 여지를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멘털이 나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나를 모른 척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오빠는 이미 자신 생각했고 내게 빼앗긴? 부모님의 사랑을 되찾을 기회라 여다.

남편은 여태껏 그래왔듯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조용히 입 다물고 쥐 죽은 듯이 물러나 앉아 있었다.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것은 자신인데 부모님을 찾아가지도 않고 매일 전화를 드려 죄송하다 빌지도 않았다. 이사 다음날 전화를 드려 죄송하다고 한 번 말씀드린 게 다였다. 그걸로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역시 남편 내게 사과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이사를 나오기 1년 전 crps를 진단받았을 때부터 이미 난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찾아보면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에 희귀 난치 질환을 그것도 아직 발병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불치병이 두 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 들일수 있는 사람이 글쎄,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중 한가진 죽을 때까지 죽도록 아픈 병이다.


CRPS는  인간의 본성마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괴물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통증에 시달리며 나는 빠르게 나를 잃어 갔다.

그토록 믿고 매달렸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내던져 버렸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해도 내 옆에 계시진 않다고 울며 소리 질렀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도대체 왜? 내게 이런 형벌과도 같은 병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crps의 통증이 어땠었는지는 사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이전에 내가 경험해 본 적 없었던 생경하고도 무지막지한 심지어 무식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고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은 생생하다.(해리성 기억 상실이라 어떤 일정한 기간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고 또 어떤 기억은 사진을 본 듯 장면이나 순간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내게 통증이 일어나는 순간을 외면했던 남편은 딸이 없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처음 1년 반 동안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조차 않았고 내가 기절을 시작하고 나서야 딸을 도와 나를 방으로 옮기고 내가 겪는 고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119 구급 대원분들이 집으로 오는 것이 일상이 되어갔다. (얌전한 콩이가 외부인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 이유입니다)

대리석으로 된 아일랜드 식탁에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해 뇌진탕이 생기고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그대로 앞으로 실신하며 무릎과 갈비뼈 사이에 주먹이 끼어 갈비뼈에 금이 갔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몇 발자국 걷지 않고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세게 찧었고 꼬리뼈에 금이 갔다. 온몸과 머리, 이마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이렇게 심하게 기절을 하고부터 혼자 있을 수 없게 고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외출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이사를 하며 환경이 바뀌는 경험과 가족이 나를 버렸다는 정신적인 충격, 그리고 평생 처음 겪어보는 말로 표현 못할 극한의 통증, 남편에 대한 배신감, 또 한 번의 실망감, 이 모든 것들이 분노가 되어 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숨 만 쉬고 있을 뿐 그때의 난.... 말 그대로 그냥 미친년 그 자체

였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친 나를 붙잡은 건 내 하나뿐인 지니였다. 

집안 곳곳에서 기절해 쓰러진 나를 혼자서 침대로 옮기고, 통증에 몸부림치는  손을 잡아주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약을 챙겨 먹여주고, 식사를 챙겨주고, 씻겨주고, 우는 나를 안아주고, 기억을 잃은 나를 붙잡은 건 전히 딸의 노력이었다.


너무 변해버린 엄마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키던 콩이의 눈을 실명으로부터 지킨 것도 딸이었다. 3살밖에 되지 않았던 콩이는 급작스러운 모든 변화를 덤덤히 견디는 듯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급성으로 백내장이 진행되는 것을 딸이 발견하고 다행히 늦지 않게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어리기만 할 것 같았던 딸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기절한 나를 딸은 혼자서 침대로 옮길 수 있었지만 남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딸은 그렇게 나를 지켜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생기던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딸이었지만 1년에 한두 번씩은 스트레스와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한 토사곽란을 겪었다. 돌이 지나서부터 6살까지 여러 가지 잔병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 1년에 10달은 병원신세를 졌던 딸이었기에 나는 딸이 아플 때 내가 아무리 아프고 정신이 없다고 해도 바짝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날도 딸이 초저녁부터 화장실을 들락 거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괜찮은지를 묻고 나 또한 혼곤한 잠에 빠져 들고는 했던 날이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갈 무렵에 눈을 떴을 때 콩이가 내 옆에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거실로 나가 불을 켜고 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거실 화장실 앞에 엎드려 있던 콩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화장실 문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콩이야. 누나 어디 갔어? 누나 화장실에 있어? 누나가 안 나왔어? 이렇게 비켜봐. 엄마가 누나 나오라고 할게. 지니야? 지니야? 너 화장실에 있어? 문 좀 열어봐. 너 괜찮아?"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분명히 안에서 인기척이 있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에 모기만 한 목소리로 딸이 대답했다.


"엄마. 나 계속 토하고 설사가 심해. 너무 어지럽고 힘이 없어. 그런데 지금 화장실이 많이 지저분해서 문 못 열겠어. 조금만 기다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조금 있어도 계속 힘없어. 조금 있으면 지금 보다 힘 더 없어. 빨리 열어. 엄마 들어 가게. 더러운 거 신경 쓰지 마. 니 똥오줌 기저귀 내가 다 치워주고 키웠거든. 얼른 열어."


딸은 문을 열며 엄마에게 통증이 생길 것을 걱정했지만 그때만큼은 난 아픈 딸을 둔 엄마였다. 나보다 키가 9cm나 더 큰 딸을 번쩍 안아 들고는 더러워진 옷을 벗겨내고 따뜻한 물로 빠르게 씻긴 후에 준비해 놓은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곤 남편을 불러 응급실로 보냈다.

그리고 집에 남아 지저분한 욕실을 깨끗이 치운 후에 통증이 생긴 팔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다 이내 기절해 버렸다.


응급실을 다녀온 딸은 힘들었던 토사곽란의 후유증으로 며칠을 힘들어하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내 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내게 말을 했다.


"엄마. 자고 일어났는데 오른쪽 얼굴이 이상해. 감각이 없는 것 같아. 팔도 무겁고. 다리도 무겁고. 엄마. 나 왜 이래?"


딸의 오른쪽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가 처져 있었다. 딸이 오른쪽 다리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 인생이, 내 삶이 끝을 모르고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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