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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니 Dec 09. 2021

실수담

머리에 많은 문장이 들어있는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쓴다

    쌀쌀한 날씨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같은 마른 공기가 찾아온 때다. 겨울이 오려나보다. 지구가 열심히 태양을 돌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런 환절기엔 호흡기 환자들이 늘기 마련이다. 그래도 COVID19 덕분에(?) 셀프위생 개념이 좋아졌는지 예전만큼 기침과 콧물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고 하더라.


    얼마 전부터 계절마다 오는 비염으로 인해 치료를 받으러 오시는 아주머니가 계시다. 하루는 '비염에 뭐가 좋냐'는 질문을 하셔서 뭘 말해드릴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건강기능식품처럼 편하게 먹거나 마실 수 있는 것을 원하시는 질문이었다. 이것저것 떠오르긴 했지만 단미*가 아니라 방제** 단위로 생각하는 게 익숙한 나로서는 뭘 말해드려야 되나 싶었다. 개중에 기억에서 가장 먼저 끄집어낸 건 신이(辛夷)였다.

*단미(單味): 1개의 한약재를 일컫는 한의학 용어.

**방제(方劑) : 한약의 배합 원칙과 치료 경험에 근거하여 만든 처방. 일반적으로 한약은 여러 한약재가 섞여서 하나의 처방 이름이 붙게 된다.

개화한 목련

    신이를 들어본 적 있다고 대답하셨다. 목련 꽃잎 차가 선물로 집에 받아둔 게 있으시다며 커진 눈으로 반가워하던 얼굴이 기억난다. 진료실에 돌아와서는 추천드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어 자료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아차 싶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목련의 꽃봉오리

    신이는 목련의 꽃봉오리다. 꽃잎과 꽃봉오리에 대한 차이를 증명해놓은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분명 약전에 등록되고 예로부터 쓰여온 약용부위는 미개화(未開花)의 꽃봉오리다. 아주머니께서 갖고 계시는 꽃잎 차가 정확히 어느 부위에서 유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꽃봉오리와 꽃잎은 뭔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차이가 있든 없든 여하간에 한약으로서의 신이는 꽃봉오리인 건 말씀드리고 싶었다.


    얼마 전에도 한 친구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이러저러해서 편찮으신데 평상시로 드시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는 거였다. 식사 자리에서 가볍게 나온 이야기라 이것저것 물어볼 순 없었다. 대신 짧게 건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계지*와 계피**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계지(桂枝) : 육계나무의 어린 가지

**계피(桂皮) : 육계나무의 줄기껍질


    계지와 계피는 같은 나무에서 나오는 약재지만 그 부위가 달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 차이에 대해 실컷 설명했더니, 웬걸. 며칠 뒤 우연찮게 본 자료에서 내가 정반대로 설명을 잘못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여기에서도 아차 싶어서 뒤늦게 친구에게 연락해 부연설명을 해준 기억이 있다.



    준비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은 말보다 못할 때가 많다. 말이란 건 나와 당신 사이에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실수가 생기기 십상이다. 그걸 다시 바로 잡는 일은 귀찮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그래서 오히려 글을 쓰는 게 마음 편할 때가 많다. 문장을 쓰는 일은 나만의 준비시간을 넉넉히 마련할 수 있지 않나. 물론 글은 마감이 쓰게 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ㅎㅎ


    "머리에 많은 문장이 들어있는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쓴다. 임상현장에서도 많은 지식을 알고 있고, 어떤 디테일한 확인과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좋은 진료를 결정짓는 방법일 것이다."


    얼마 전 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금 와닿는 일들이었다. 본질적으론 말이든 글이든 다 비슷한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야, 그러니까 내 마음과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들이 많아야만 실수 없는 말, 실수 없는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게 아닐까나. 좀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그리고 좀 더 나은 문장을 말하기 위해 겪어야 할 일들이 한참이고 남았나 보다.


    아, 그 아주머니께는 다시 설명을 잘 드렸는데... 한약으로는 꽃잎이 아니라 꽃봉오리를 쓰긴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권해드려서인지 어필이 덜 되었던 걸까. 몇 주 뒤에 다시 여쭤보니 따로 드시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하시더라(ㅎㅎ). 다음번엔 다른 좋은 문장으로 말씀드려야 하나, 생각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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