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특별한 숙박, 청춘이라는 별장
소설가의 산문17 -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
삶의 특별한 숙박宿泊, 청춘이라는 별장
-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인생에서 인상적인 특정 장소를 생각할 때 같이 고려되는 것은, 시기와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경관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사카니시 도오루가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슈스케와 여름 별장에서 설계사무소 직원들과 보낸 한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때 사카니시는 스물세 살 청년이고 여름이었으며 그곳은 안개마저 푸른색일 것만 같은 숲속 별장이었다. 20대· 여름· 그리고 별장은, 짧게 머물렀으나 강렬하게 남아있는 우리 삶의 무엇과 닮아있다. 순정한 싱그러움, 바로 청춘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잠잠한 삶의 지금에서 회상하는 색채와 소리, 비누 향기로 각인 된 청춘의 서사시이다.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국립 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이라는 큰 사업을 위해 모인 건축가들의 건축과 건축에 관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내용의 상당 부분을 그것에 할애하지만 ‘건축’보다는 ‘건축하는 사람들’, 더 정확히는 ‘건축하는 사람들의 건축하는 자세’에 관해 서술한다.
교회를 나와서 유리문 너머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신앙을 갖지 않은 건축가가 그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교회에는 기도와 같은 것이 형태가 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 형태는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을 내부로부터 진정시키고, 혹은 격려하고 움직일 것이다. 나는 교회를 등지고 완만한 언덕을 내려오면서 무라이 슌스케라고 하는 건축가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 등이 떠밀리듯이 잰걸음이 되어있었다. p77
비단 건축가뿐만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 그것에 종사하는 이가 혼을 갈아 넣은 것에는 모종의 기도 같은 것, 그리하여 신앙이 되어버리는 지점이 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경외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이곳의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별장은 그래서 특별한 공간이 된다.
청춘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뭐니해도 사랑일 것이다.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에게 두 명의 여성이 다가온다. 선생님의 조카 딸 무라이 마리코와 같은 일을 하는 나카오 유키코다. 그러나 그가 이 둘과 나누는 사랑은 결을 달리하는데 그것은 마리코는 장작불과 같고 유키코는 반딧불이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코 불을 보고 있었다. 장작과 장작 사이에 약간의 틈을 주고 늘어놓으면 그 틈새로 신나게 불길이 솟구친다. 사이를 떼어놓으면 그 순간 불길이 약해지고 빨갛던 장작이 하얀 연기를 내면서 까매진다. 장작을 가까이 갖다 붙이면 다시 불꽃이 일어난다. 불꽃은 장작과 장작 사이에서 태어나는 덧없는 생물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은 불타는 장작 소리만 이따금 튈 뿐, 빗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p41
사카니시와 마리코는 여름 별장에서 늘어놓은 장작처럼 불꽃이 튄다.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육체를 나눈다. 그러나 도쿄로 돌아가서는 사이를 떼어 놓으면 약해지던 장작처럼 불길이 약해진다. 사카니시가 느끼던 불안은 현실이 된다.
마리코는 늘 직구를 던져온다. 내가 얼마나 그 공을 받아 치고 있는가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 사이는 언제가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p345’
사카니시에게 마리코는 별장 같은 사랑이 아닐까. 실제로 마리코를 향한 마음이 시작된 곳도 그녀의 별장에서였다. 별장의 사전적 의미가 ‘살림하는 집 외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는 집’임을 생각하면, 사카니시에게 마리코는 별장의 별장이다. 여름 별장은 일을 하려는 목적으로 모인 생계를 위한 곳이었으므로, 사카니시에게 진정한 의미의 별장은 마리코의 별장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마리코와 생활을 같이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유키코는 어둠 속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다. 노미야 하루에의 집에서 별장으로 돌아가는 밤, 그들은 회중전등을 끄고 깜깜한 산길을 걷는다. 그들은 드문드문 나타나는 반딧불이 같은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칠흑 같은 삶의 어둠 속을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간다.
“이대로 회중전등 없이 걸어보지 않을래?” 놀자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유키코가 말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유키코가 있는 어둠 쪽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유키코의 손이 닿았다. 좀 더 찾아서 잡아당기듯이 해서 왼손을 쥐었다. ... 유키코의 왼손이 주저없이 내 오른손을 잡았다. 우리는 꼭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옆에 눈길을 줘도 유키코의 모습은 어둠에 녹아들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쥔 손의 감촉만이 어둠 속에서 부풀어오른다. ...문 앞에 서자 유키코 얼굴이 외등에 비춰졌다. 어둠 속에서 여기에 돌아왔다, 고 나는 생각했다. 유키코는 평상시와 똑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p248)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화자인 사카니시도, 그가 존경하는 무라이 슌스케도, 마리코도 유키코도 아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진짜 주인은 여름 별장과 그 여름 별장 주위로 펼쳐지는 경관이다.
도쿄의 사무실을 벗어나 가루이자와 기타아사마의 아우쿠리 마을에 위치한 여름 별장으로 가는 것은, 세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의 본질은 외부와 구별된 내부의 경험 속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장소의 안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소속된다는 것이고 그곳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사카니시는 여름 별장이라는 내부로 들어가, 그곳의 사람들과 삶과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그의 인생의 가장 안쪽, 내부 깊은 곳을 내밀하게 체험하는 일과 동일하며 추후 그가 살아갈 삶의 본질이 된다.
여름 별장에서의 생활이 내부라면, 별장 밖의 경치는 외부의 일이다. 표고 천 미터가 넘는 아사마산의 고요한 숲에는 오색딱다구리를 비롯해 소리는 기억하되 이름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온갖 새들이 살고, 반딧불이 연못을 유키코의 손을 잡고 걸으며, 마리코의 자동차를 타고 나가 가루이자와의 기노쿠니야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별장 밖에는 폭설에 집 한쪽이 무너진 노미야 하루에와 집에 도둑이 든 선생님의 미대 동창 야마구치 겐이치로가 산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선생님의 애인 후지사와 기누코도 있다. 그 길들 사이를 우치다의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여름 별장의 안과 밖, 그 사이의 경치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묶고 연결하며 관계 맺는다. 아사마산의 풍광과 끊임없이 상호작용 하며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여름 별장의 정체성일 뿐 아니라, 여름 별장에 ‘관한’ 정체성이고 곧 사카니시 삶의 정체성으로 뿌리내린다. 그것의 증명은 사카니시와 유키코 부부가 다시 그 별장에 돌아가는 것으로 구현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는 동안 마치 내가 아사마산 그 숲속에 있는 것처럼, 초록에 취해 새 소리를 듣고 작고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보았다.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말처럼, 모든 문장이 내 핏속에 녹아 팡, 팡, 발화하는 것 같았다.
삶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다. 물론 대단한 것 없는 이‘즐겁지 않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상인지를 알 만큼 나는 나이를 먹었다. 또한, 하나도 특별해 보이지 않던 그 청춘의 나날이 얼마나 눈부셨는지도 이제 안다.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의 장소들에 대해서, 그 장소가 남몰래 품은 의미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내 청춘이 오래 남아있을 그곳을 떠올리자 나는, 다짜고짜 조금 서러워진다. 어쩌면 청춘은 먹고사는 일에 기진하여 쓰러져 잠드는 생의 많은 날 중에서, 초록이 비처럼 내리는 숲속 별장에서 보낸, 잊을 수 없는 몇 날 밤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