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영혼을 사랑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위대함
소설가의 산문 18
- F. 스콧 피츠재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위대한 개츠비’는 너무나 유명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설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쯤 바즈 루어만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캐리 멀리건 주연의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를 먼저 접했다. 영화를 본 후, 원작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 영화를 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영상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고,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너무나 훌륭했다. 그 생각은 꽤 견고했고, 그래서 책을 읽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F. 스콧 피츠재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나의 기대보다 백 배쯤은 더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스콧제럴드의 문장은 마치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자주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파티의 한가운데에 서 있거나, 개츠비와 함께 건너편 만의 초록색 불빛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돈으로 가득 찬 데이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다시 만나는 개츠비의 떨리는 심장을 함께 느꼈다. 이토록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장면들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설을 번역한 김욱동의 “세계 소설사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이 작품처럼 서정적인 작품을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놓치고 말았지만 원문을 읽다 보면 마치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고백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대치처럼 보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개츠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랑을 꿈꾸는 인물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데이지가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가진 데이지를 사랑 그 자체로 믿으며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말 그대로 모든 것, 시간과 돈 그리고 종국엔 목숨까지.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도 환상을 빼면 남는 게 있을까. 우리는 모두 환상을 가짐으로써 현실을 살아내고, 견딜 수 있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어떤 것, 우리가 헌신하는 무엇은 모두 환상이다. 우리 또한 그 환상이 환상이 아니라 실체라 믿으며 살고 있을 뿐이다. 환상이라 믿는 그것의 실체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실체로 보일 때, 삶은 시시해져버린다.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환상과 이성에 한 발씩을 담그고 적당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마침내 도달하는 질문,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한가’에 가 닿는다. 위대하다면 왜 그러한가에 이르기까지 생각이 많아진다.
모두가 환상과 이성에 한 발을 담그고 아슬아슬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이 세계에서 양쪽 발을 모두 데이지라는 환상에 푹 담그고 개츠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사랑으로 뛰어드는 무지막지함에 대한 정도가 ‘위대함’의 기준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위대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개츠비는,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