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깊은 연민, 사랑으로 가는 첫걸음
소설가의 산문 19
필립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70대에 접어든 문학 교수 케페시가 자신의 60대 문학 교수 시절을 회고하며 독백(정확하게는 자신의 집 소파에 앉은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그는 기말고사가 끝난 후 자신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고, 수업 기간에 눈여겨본 콘수엘라와 관계를 맺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뜻을 이룬다. 케페시는 콘수엘라의 아름다운 몸, 눈부신 젖가슴에 완전히 매료된다. 그러나 그녀와 관계를 가진 이후 케페시는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그녀와 사귀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바로, 갈망이다. 심지어 그녀를 안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콘수엘라를 갈망한다. 그녀가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들을 질투하고 어린애와 다름없는 그녀의 옛 애인을 따라하기도 한다. 그는 그녀와 연결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도 불안에 몸서리치고, 자신의 늙은 몸을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녀의 졸업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수엘라에게 매몰차게 버림받는다. 몇 년이 흐른 늦은 저녁, 케페시는 유방암에 걸렸다는 콘수엘라의 전화를 받는다.
케페시는 어린 여자가 좋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는 늘 ‘순수의 상태’인 섹스를 통해 인생의 유일한 승리를 맛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콘수엘라를 알게 된 순간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오직 그녀, 아름다운 젖가슴의 여신을 갈망한다.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는 찰나가 미친 듯이 불안하고, 그녀를 가졌던 젊은 몸들을 질투한다. 자신이 알려준 모든 즐거움을 학습한 콘수엘라가 다른 이와 즐거울 상상을 하면 견딜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콘수엘라의 전화를 받는다. 유방암에 걸린 그녀는 이제 그가 그토록 경애하던 젖가슴을 도려내야 할 지경에 있다. 젖가슴이 없는 콘수엘라, 케페시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한다. 그리고 소설은, 소파에 앉은 누군가의 말로 이렇게 끝난다. 가면,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 건 줄 알면서도 자신을 원하는 상대에게로 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사랑이다. 콘수엘라는 이제 그가 경외하던 젖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케페시는 큰 수술을 앞두고 힘들어하는 그녀 곁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욕망과 사랑을 구별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이 좋아했던 그 무엇을 상대가 잃었을 때도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가?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욕망,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 이야기는 본능으로 시작해 충동을 거쳐 욕망에 이르는, 그리고 그 욕망이 연민을 딛고 비로소 사랑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케페시는 욕망보다 깊은 연민을 딛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옮기려 한다. 케페시 안에, 욕망으로 들끓던 짐승 하나가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