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에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개인은 특정 계급, 특정 직업, 특정 가문에 속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고, 개별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초의 유대에서 아이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듯이, 개인은 집단 안에서의 소속감과 안정감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는 개인을 그룹화하는 경계들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가지고 태어난 ‘계급’보다는 자신이 이뤄낸 유·무형의 ‘자산’이 중요해지기 시작했고, 같은 직업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생겼다. 개인들은 그들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계가 없어짐에 따라 일정 정도의 자유를 획득했으나, 그 해방감은 긍정적인 경험만을 제공하지 않았다.
사회는 여전히 거대하고, 자본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는 가운데,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고 불완전하고 조그마한 존재였고, 자유가 주는 무거운 책임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피처를 찾기 시작했다. 각각의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불안한 개인은 종교개혁 시기에는 종교 집단 속으로 도피하여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으려 했으며, 근대에는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국가 속으로 도피했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권위주의적인 속성, 지배하고, 또 지배당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학-피학적 속성은 이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합리화하였다.
역사는 자유에의 요구와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반복되며 순환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또 다른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시대도 개인의 자유를 이토록 보장해주지 않았고, 이를 토대로 (르네상스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포용성의 토양 위에서 꽃피고 있다. 전통적인 관습은 파괴되고 있고, 사람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조금 다른 관점에서 기존의 생각에 반박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성’ 속에 도피해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도피처는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종교 단체나 국가 권력같이 뚜렷한 실체를 가진 것들이 도피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해서든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유동적으로 변하는 여론은 불안한 개인을 끊임없이 압박하며 노력하게 만들고, 따라서 우리 사회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창조적이며 특별하다고 인정받는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창조적이고 특별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를 더 빠르게 읽고 잘 수용하는 수동적인 존재인 경우가 많다.
흔히 현대 자본주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나타내는 말로 ‘돈의 노예’, ‘성과의 노예’라는 말이 사용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예는 자유로움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상태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유롭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개인이 소극적 자유만을 획득했을 때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소극적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계층으로부터의 자유(르네상스), 왕권으로부터의 자유(근대)는 개인을 소극적 의미에서는 자유롭게 해 주었으나, 그가 진정으로 그 자유를 통해 모든 불안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개인은 또다시 도피하고 말았다. 적극적 자유는 ‘~에 대한 자유’를 뜻한다. 저자는 적극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발성에 근거한 자아실현을 말한다. 다만, 이 결론의 한 가지 한계 개인이 과연 완전히 자발적일 수 있느냐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느낀 것이 진정 나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느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조금은 공허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분석과 사고 과정, 저자가 진단한 사회의 모습은 지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것이 결국 이 책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