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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돌 기자 Mar 25. 2022

잔술의 낭만

잔술은 낭만적인 술이라고 생각한다. 소주 한병, 막걸리 한병 이렇게 팔면 될 것을 굳이 나눠 파는 게 꼭 술 파는 사람보다 술 마시는 사람을 배려한 술 같아서다. 잔술이라고 하면 술찌들이 대환영하지만, 나는 잔술은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주머니에 천원 한장밖에 없어도 이를 소주 한잔으로 바꿔 먹는 찐술꾼을 위한 술, 그게 바로 잔술이다.

영화 <소공녀>에는 위스키를 사랑하는 3년차 가사도우미 '미소'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미소는 돈이 없는 청년이다. 담배도 피워야 하고, 집세도 내야하고, 위스키도 마셔야하고, 돈을 못 버는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놓칠 수 없다. 새해가 되어서 담뱃값, 집세가 오르자 미소가 포기한 건? 술? 담배? 아니다. 집이다.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끊는 대신 집을 나와버린다. 미소에게도 위스키 한잔은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 삶의 희망 뭐 그런거다. 꿀 같은 위스키 한잔에 그날 하루 피로가 날아간다. 누구는 술 때문에 집을 포기한다고?! 라고 고함을 지를 일이지만, 요즘 MZ세대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행동도 아니다.

잔술은 대게 서민과 가까운 곳에 있다. 예를 들면 낙원상가, 탑골공원 근처 일부 포차들. 이곳에는 은퇴한 어르신들이 많아서 가게 주인들이 굳이 술 한 병으로 주머니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 막걸리 한잔에 천원. 입가심용으로는 딱 좋다. 소주 한컵에 천원. 천원짜리 술이지만 홀짝홀짝 아껴 먹는다.

농촌에도 잔술을 파는 곳이 있다. 동네 슈퍼들이다. 밥그릇에 아낌없이 담아주는 밀막걸리도 좋지만, 더 재밌는 건 소주키핑 문화다. 진열장에 어르신들이 마시다 남은 소주를 보관해두고 논과 밭을 오가면서 찔끔 한잔, 또 한잔 그렇게 술을 마신다. 양주도 아니고 소주 키핑을 받아주다니. 재밌지 않은가.

인기 좋은 산에 올라가도 잔술을 만날 수 있다. 술 파는 사람이 그 무거운 술들을 이고 지고 올라와서 정상에서 잔으로 판매하는데 올라온 술의 양을 보고 있자면 '인간 승리'가 따로 없다. 주종은 대부분 막걸리다. 소백산막걸리, 지평막걸리 같이 이름있는 막걸리들을 죽 늘어놓고 파는 걸 보면 술을 안 먹던 사람도 괜히 목이 마르다. 과자나 완두콩, 집에서 한 김치 같은 간단한 안주를 센스 있게 구비해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글을 쓰다보니 진득한 막걸리가 먹고 싶어진다. 나에게도 주머니에 천원이 있다면 그 돈을 술 한잔 먹는 낭만에 쓸 수 있을까. 아직 알쓰에게 술의 왕도는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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