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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Jun 15. 2022

울다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니


     직장에서 남몰래 울었다.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물을 감추는 게 쉬웠다. 처녀 적에는 직장에서 상사가 힘들게 하거나, 모욕이나 수모를 당했다고 느낄 때, 너무 힘들고 지치면 자주 울었다. 참 많이도 울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나였지만, 서러움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때 흘렸던 내 눈물로 한 바다를 이룰 수 있을 정도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 후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행복해서, 감동의 눈물을, 감격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수모를 주고 모욕을 주더라도 내 곁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쉽게 상처받지 않았고,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오히려 측은하게, 긍휼히 여길 수 있었다. 하여 울지 않았다. 내 눈물의 원천은 서러움이 아니라 행복의 충만함이었다. 


     그런데 오늘 울었다. 아직 한 달도 채우지 않은 직장에서 울었다. 서러워서 울었다. 어차피 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고 여겨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아니라 개개인이 가진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평등의 문제에 앞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좇아 타인을 대한다. 


     내가 정규직이었다면, 함부로 대할 수 있었을까. 내가 비정규직 파트타이머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의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비록 내가 훨씬, 열 살을 더 많이 먹었지만,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게 신경질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은 차별의 문제였던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울었을까. 아직도 이런 일들이 나를 서럽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눈물이 나올 줄 몰랐다.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고 있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엄마’라는 이름의 내가 이런 일로 울다니, 사소하다면 사소한, 웃고 넘길 수 있는 일로 울다니, 말이 되는가 말이다.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이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오늘의 일을 남편에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편이나 딸에게 말하면 무척 속상해할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남의 돈 먹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나만 힘들다고 엄살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나보다 더 힘들게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부지기로 많은데, 어린애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결국 글로 쓸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글로 쓰면서 위로를 받고 마음을 정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글을 쓰기 전, 집에 돌아와 남편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친정엄마와 전화통화를 하고 나니 직장에서의 일이 옛날, 먼 옛날의 일로 여겨진다.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출근을 서두를 것이다. 먼저 퇴근을 하면서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다. 나의 이런 행동은 비굴한 행동일까. 아니면 허세일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를 향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직장을 다닌 후로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한 것이, 비록 핑계였을지라도 무척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열 시를 넘기지 못하고 눈이 스르륵 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익숙해지고,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를 이틀에 걸쳐 끝마쳤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정까지 책을 읽었지만, 오히려 피곤이 싹 풀리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의 주인공이 내게 던진 질문의 단초로 작용했다.


     책의 내용은 이러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사였던 나는 정년 퇴임 후 아내와 함께 한적한 시골에서 <우리 집>을 찾아 정착한다. 그런데 이사 온 이틀째 날부터 옆집에 사는 70이 넘은 의사가 오후 네 시만 되면 찾아와 여섯 시에 돌아가는 날들이 반복된다. 의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시 정각에 문을 두드리고 6시 정각에 돌아간다. 안락의자에 앉아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표정도 없이 질문에 “그렇소”와 “아니오”라는 두 가지의 대답만을 하는, ‘공허’만 남은 사람이다. 교육자인 나는 윤리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 예의 바르고 온화한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의사인 베르나뎅 씨를 만나고 난 후부터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에밀 아젤이 있음을 깨닫고 둘 중 누가 진짜고 옳은 것인가를 고민한다. 베르나뎅 씨는 시간의 지나감 속에서 자신의 죽음만을 바라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불면증이 있던 나는 자살하려는 베르나뎅 씨를 살렸던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똑같이 불면증이 있는 베르나뎅 씨를, 자신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베르나뎅 씨를 베개로 눌러 죽인다. 이 살인은 살인이 아니라 구원이고 보시라고 나는 믿으며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베르나뎅 씨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부인, 베르나네트를 아내와 함께 돌본다.


     소설은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어제 읽고 난 후에도 인상적인 소설이었는데, 오늘 내가 흘린 눈물을 보며, 나도 모르는 두 명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감추고 있는 내 본성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밤과 낮과 같은 두 개의 인격이 내게도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장이 내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자정이 넘었다. 비가 온다. 내일 비가 갠 아침에는 아파트 앞 들녘에 왜가리들이 벼를 심어놓은 논에서 하얀 날개를 파닥거리며, 흰 옷 입은 사람처럼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또 시작할 것이고, 내 하루도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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