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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은하철도 999의 밤

그땐 그랬지!

by 정이음 Mar 18. 2025

  집으로 가는 길, 개가 나를 보고 컹컹 짖는다. 흰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짖어대는 백구는 나를 위협하려고 짖는 걸까, 반갑다고 짖는 걸까.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보아 나를 반기는 것이라 짐작하고 나도 개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개가 한층 더 짖는다. 차들이 멈춘 조용한 길가에서 맹렬히 울려 퍼지는 개 짖는 소리.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온다. 노을이 내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오래전, 원룸에 살다가 개를 기르기 위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간 적이 있다. 잠깐의 중국생활을 준비하고 계셨던 선생님이 강아지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학교 앞의 원룸에 살던 내게 어째서 개를 맡길 생각을 하셨을까. 마당이 있는 집도 아닌, 아직 어린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 내게 비록 강아지라지만 개를 맡기신 선생님이나 선뜻 개를 키우겠다고 한 나나, 괜찮다고 쾌히 승낙을 한 남편이나, 모두 똑같은 사람들인 셈이지만, 어찌됐든 강아지는 우리 집으로 왔다. 


  강아지는 진돗개와 똥개의 잡종으로 흰 털을 가졌다. 강아지를 아이들과 함께 방에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베란다에서 높고 길다란 빨간 다라이에 넣어 키우기로 했다. 선생님은 강아지를 ‘단풍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들 이름으로 지으려다 만 ‘강산’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 3월에 낳은 아들과 6월에 온 강아지는 약속이나 한듯 무럭무럭 잘 자랐다. 8개월 된 사람은 여전히 아기였지만, 5개월이 지난 강아지는 개가 되었다. 더 이상 원룸에서 개를 키울 수가 없었다. 이사를 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이사한 집 주인은 할머니였고, 우리가족이 살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떨어져 있었다. 집이라고 해야 겨우 열 평 남짓의 방과 옛날식 부엌이 딸린 것이 고작이었다. 난방은 기름으로 했지만, 흙집이어서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다섯 살 딸과 아직 돌도 되지 않은 둘째를 데리고 살아야하는 만만치 않은 집이었다. 오직 선생님이 주신 개의 편안을 위한 집이었다. 개는 그 집 마당의 한쪽, 화장실 옆 수도와 수챗구멍이 있는 곳, 똥을 싸면 바로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 마음대로 짖고, 배불리 먹고, 비록 목줄을 달고 있었지만, 편안해 보였다.


   문제는 인간인 우리들이었다. 남편은 추위를 막기 위해 난로와 도끼를 샀다. 나무는 마을 뒷산에서 벌목된 소나무와 참나무를 주워 왔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했다. 연기를 방 밖으로 나가게 하려고 유리창 하나를 떼어내고 연통크기의 둥근 구멍을 남겼다. 그 구멍에 흰 종이를 붙여 구멍 안으로 연통을 넣어 밖으로 빼내 연기를 밖으로 나가게 했다. 눈이 쌓여있던 나뭇가지들은 습기 때문에 쉬이 불붙지 않았다. 그 위에 올려놓은 굵은 장작까지 불이 옮겨 붙으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연기가 배출되고 난 후였다.  


   매일 오후 다섯 시 정도에 시작되는 불붙이기는 난로 속에서 불꽃이 활활 타올라 방을 따뜻하게 하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국민(초등)학교 때, 교실에서 피웠던 난로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남편은 단 한 번도 쉽게 불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둘째는 등에 업고, 딸아이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와 연기를 피했다. 여우굴이 따로 없었다. 그 여우 굴 앞에 아이들과 서 있을 때면, 깊은 산골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막막하면서도 어쩐지 포근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방안은 그을음과 탄 냄새가 가득했고, 못에 줄줄이 걸어놓은 옷에서도 탄 냄새가 나고 흰 옷들은 누런색으로 변해갔다. 악전고투, 칠전팔기로 불을 붙여 논,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난로에서는 빨간 숯불이 방을 포근하게 감싸주다가 새벽이면 재로 화했다. 부지깽이로 난로의 숯불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얼굴이 아폴론처럼 잘생긴 신(神)은 고구마를 굽기도 했다. 난로 앞에 모여앉아 말랑말랑 익은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면서 추위를 잊고, 아이들의 오물거리는 입을 보면서 세상시름을 잠시 내려놓기도 했다. 고구마의 맛이 입속에서 사라질 때, 추위는 어김없이 다시 찾아들었고, 쥐들은 어디선가 이어달리기 시합을 했다.


   부엌문은 나무로 된 문인데,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제대로 닫히지 않아 닫아걸어도 5센티 정도의 틈이 생겼다. 겨우 가스레인지가 있고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었다. 뜨거운 물은 들통에 담아 가스레인지로 데워서 사용했다. 둘째아이를 그곳에서 씻겼다. 붉고 둥근 고무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채운 후 생후8개월 된 아이를 집어넣었다. 방문은 열어놓았다. 방에서는 딸아이가 휴대폰 카메라로 목욕하는 장면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찍기도 하면서 ‘은하철도 999’나 ‘미래소년 코난’을 목청껏 부르는 제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기도 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겨울의 찬바람이 벌거벗은 아이의 몸을 자꾸 쓰다듬었다.


  “여기 봐, 여기 보라니까!” 

  딸아이가 동생을 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추위로 파랗게 질린 얼굴이 누나를 바라보았다. 마주 본 둘은 몸을 흔들며 깔깔거렸다. 무엇이 그리 재밌고 우스웠을까. 웃음은 전념성이 강했다. 나도 웃고 고무다라이의 물도 철썩철썩 웃었다. 아이들은 건강했다. 그때 내 삶은 아이들 소꿉놀이 같았다.


  남편과 나와 딸은 마당 끝에 있는 시멘트로 지은 임시 건물에서 목욕을 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욕조도 없었고, 옷을 벗으면 윗니 아랫니가 맞부딪혔다. 털 뽑힌 닭처럼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딸아이를 먼저 씻겨 옷을 입혀 놓고, 나는 대충 비누칠한 몸에 바가지로 서너 번 물을 뿌렸다. 함께 밖으로 나온 아이와 나는 춥다고 호들갑을 떨며 바람이나 막아주는 방으로 종종걸음 쳤다. 양 볼에 홍조를 띤 아이가 예뻤다. 


  우리가족은 그 집에서 겨울을 나고, 그 이듬해 봄, 다시 원룸으로 이사했다. 원룸 앞마당에서 개를 키울 수 있었고, 여섯 살이 된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21세기의 삶과는 유리된 삶을 살았다. 추웠고, 비문화적이었다.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남편은 학생이었고, 나는 엄마였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여섯 살이 안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덜 입고, 덜 먹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집 근처 남편과 내가 다녔던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계절마다 바꿔 피는 꽃들을 사랑하고, 운동장에다 한 가득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했다. 쉬는 날이면 학교 뒷산에 올랐다. 봄에는 쑥을 캐거나, 찔레를 따 먹고, 여름이면 산딸기를 따고, 가을이면 밤을 주웠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나는 아이들 속에서 행복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지배했다. 그 힘에 복종하는 나는 노예가 아니었다. 복종했지만, 내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아이들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알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삶의 방식, 삶의 진리들을 직접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사이 마당이 있는 집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해서 강산이와 살다가 강산이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났고, 우리가족은 지방으로 이사 왔다.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집도 아파트에서 산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아파트의 삶은 그야말로 호사스런 삶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허름한 아파트지만, 단추 하나만 누르면 집이 따뜻해지고 따뜻한 물을 언제든 펑펑 쓸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지금은 살고 있다. 나는 어느 순간 구름을 밀치고 터져 나오는 빛처럼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일도 ‘그때는 그랬지’하고 가볍게 웃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렇게 못생긴 아이가 나라고?”

  “얼마나 야물딱지고 이쁘냐!”

  우리는 그때처럼 함께 웃는다. 별이 총총한 밤, 젤리를 질겅대며 ‘은하철도 999’를 부르는 다섯 살 적 딸의 동영상을 본다. 침 삼키랴, 노래 부르랴, 그럼에도 또박또박 야무지게 노래를 불러대는 딸의 목소리가 수많은 개구리 울음소리보다 더 우렁차다. 


  까만 밤하늘을 넘어 우주를 가로지는 은하철도 999처럼 우리가족은 희로애락, 세상 모든 것들이 가득한,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함께 나아간다. 길가의 어느 집 마당에 묶여 있던 개가 나를 ‘그때 그 시절’로 데려갔다. 하얀 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던 강산이처럼 그 개가 거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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