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즐거움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인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에 나와있는 이 말씀을 교훈으로 삼고 있는 대학을 다녔다. 말 그대로 해석하서 자유를 얻으려면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진리의 전당인 대학의 총장쯤 되면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총장님은 정권의 눈치나 보고 살아야 하는 고단한 행정가로 보였지만 자유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전공한 학과의 교수님도 내가 졸업한 이후에 총장이 되셨다. 훌륭한 분이시긴 하지만 자유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대학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진짜 진리가 아니거나 대학이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닌 듯하다.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자유를 얻기 위해 진리를 찾고야 한다는 잠재의식은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수십 년을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내가 찾은 진리는 '예수를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결론인데 그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지만 자유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진리의 파랑새를 못 보게 했는 것 같다. 피상적으로 아는 지식이긴 하지만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의 끝없는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는 것이 구도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죄와 사망, 생로병사의 고통과 번뇌에서의 자유는 내가 생각했던 자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종교에서 얘기하는 자유는 생소했고 실망스러웠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이긴 하지만 너무 근본적인 문제여서 그렇다. 인생의 그런 문제는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여야 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지 해결이 되는 문제는 아니다.
유치하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고 내가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는 딸을 키우면서 알았다. 우리 집사람은 아이에 관심과 애정이 많고 관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즉각 잔소리하고 바로 잡으려고 한다. 나는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고 집사람과 양육방식에 대해 얘기를 하다 다툼이 벌어진 때도 가끔 있었다. 딸아이도 지금은 다 커서 이젠 집사람도 잔소리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아직도 이런저런 충고를 한다. 그런데 딸의 태도가 묘하다. 집사람이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라고 대답할 때가 종종 있다. 그건 내가 집사람의 잔소리에 대응하는 태도다. 심지어는 방을 좀 정리하고 다니라느니, 집에 들어오면 씻고 옷을 먼저 갈아입으라느니 하는 내가 생각해도 정당한 지적까지도 반발한다. '내 마음대로 할 거야.'라는 말로 대변되는 자유로운 삶은 그래서 유치한 것이었다. 훈련이 덜 된 무책임한 본능적 자아를 따르는 것 같다. 그걸 그 오랜 시간 동안 목표로 삼고 살았다니 웃기는 일이다. 자유라는 커다란 이데올로기로 가면으로 가리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종교적 관점에서 자유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자유는 이윤극대화를 위해 규제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법률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종교에서의 자유는 결과론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인 반면 경제나 법률적으로 자유는 도구와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자유를 목적으로 생각했었다. 무언가 나를 얽어매는 것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도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부모님의 간섭, 경제적인 부족함, 절제되지 못하는 욕망, 군사독재의 엄한 교육 환경 등등 젊을 때는 나를 제한하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은 나의 제약조건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벗어났고 넓어졌다. 이제는 예전보다 많이 넓어진 제약조건하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지 곰곰이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추구는 헛되고 유치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제약조건을 확대하는 것과 적합한 목적함수를 갖는 것이다. 제약조건 자체에 도전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적합한 목적함수를 가져야 한다. 나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계속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느끼지만 배움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 Input 대비 Output이 적지만, Learning Curve가 작동할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배우고 익히고 행동하면서, 계속 성장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싶다. 배움의 즐거움과 성장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함수로 정해 본다.
하나 더. 내가 사람과의 관계가 많이 서툴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내성적인 성격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고 내 중심적으로만 생각한다. 자아가 강해져서 그런지 싫은 사람들도 생기고 싫은 일이 생기면 참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남의 말은 잘 안 들리고 내 생각만 소중해진다. 차라리 무심한 것이 싫은 소리를 참지 못하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꼰대가 되는 것보다 낫다. 점잖고 다정하고 욕심 없이 편안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 길만큼 다른 사람이 가는 길도 중요하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인으로 살다 가고 싶다. 나의 자유만큼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