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두 번째 버킷리스트
대입 학력고사를 마친 다음 날 동네의 대중목욕탕에 갔다. 평일의 늦은 아침이어서 그런지 목욕탕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커다란 탕에 담기어진 물 위로 천장의 물방울이 무게를 못 이기고 똑똑 떨어졌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고요함을 더 했다. 이제 끝났다는 마음으로 온탕에 몸을 담그고, 푹 늘어진 채로 탕에서 나와 수고한 몸을 느긋하게 닦았다. 몸에 뿌린 물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중에 상쾌했다. 어제는 시험을 끝내고 점수를 맞추어 보고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어느 순간 곯아떨어졌다. 세상모르고 잤는지 몸도 편안했다. 이제 점수에 맞추어 대학교에 원서를 내면 된다. 아직 내 점수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어제 맞추어 본 만큼 실제로 점수가 나올지 약간의 미지수가 있지만 대강의 방향은 정해졌다. 마음도 편안했다.
입시 준비에 사용한 요약 노트의 뒷장을 펴보았다. 학력고사가 끝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적어 놓았던 페이지. 지금 표현으로 하면 고3 입시행의 버킷 리스트. 길지는 않았다. 기타 배우기, 기원에 가서 하루 종일 바둑 두기, 세계문학전집 읽기, 바다로 여행, 아르바이트.
언제 돌아보아도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는 시절이었다. 3당4락 -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 – 이라고 했지만 나는 일곱 시간씩 꼬박꼬박 잤다. 그보다 적게 자면 낮에 집중이 안 되는 저질 체력 때문에. 남들은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늘 같이 공부하던 친구를 독서실에 놔두고 열한 시쯤 책가방을 싸고 집에 가서 잤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곱 시간을 잔 것도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집중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소설 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의 단편, 장편문학전집은 고3이 되기 전에 다 읽었고, 세계문학으로 넘어가서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읽고 있었고 계속 읽고 싶었는데 참았다. 기타 치는 모습이 멋있어서 배우려고 했는데 그것도 참았다. 바둑도 한참 재미를 붙여서 실력이 팍팍 늘고 있었는데 3학년 2학기부터는 일절 손을 끊었다. 그래도 완전히 참지는 못했다. 휴식을 핑계로 가끔 책장에서 전에 읽었던 소설의 명문장, 명장면을 찾아 읽고는 했다. 그 문장들이 너무 짜릿했다. 모의시험이 끝나면 휴식을 핑계로 해외 단편소설을 서너 시간씩 읽기도 했다.
입시가 끝나고 기타 배우기는 시도했지만 한 보름 만에 만지지 않게 됐다. F코드가 잘 잡히지 않아서 흥미를 잃었다. 바둑을 다시 시작하고 기원에도 가끔 갔지만 하루 종일 있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술도 마시고 새로 시작한 당구가 더 재미있었다. 세계문학전집도 옆에 놓고 있었지만 예전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손이 가지는 않았다. 친구들 만나고 노는 일에 바빴다. 바다로의 여행은 여름으로 미루어 두었다.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나의 요약노트 마지막 페이지는 잊혀졌다.
무언 가에 열심히 몰두하면 몰두하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일이 대해서도 감각이 훨씬 날카로워진다. 회사를 다닐 때 주로 기획업무를 했는데 딱 1년 동안 365일 24시간 돌아가는 영업 현장에서 고객과 맞닿은 일을 했던 적이 있다. 6개월쯤 지나 지루해질 때 즈음 현장에 경영과 관련된 책 두 권이 배달되어 왔다. 본사에 있을 때 같이 일하던 선배가 보내준 책이다. 현장에서 몸이 고단할 때는 정신노동을 해야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하면서 너무 열심히 일 만할까 봐 보낸다는 메모와 함께. 본사에서 같이 일할 때는 주말에 등산을 따라가곤 했다. 사무실에서 정신노동만 많이 했으니 몸을 움직여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끌고 다녔다. 오랜만에 경영서적을 읽으니 본사에서 일할 때는 그렇게 재미없던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던지.
이제 중년이 되어 돌아보면 고3 때만큼은 열심히 살지 못했지만 인생 전반적으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한계가 보인다. 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했지 주어진 상황을 치열하게 극복해 보려고 한 적은 많지 않았다. 열심은 있었지만 열정은 부족했다. 공부할 때도 수학은 잘했고 영어는 못했는데, 수학은 열심히 안 하고 영어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래서 평균 점수는 좋아졌는지 모르지만 수학, 영어 모두 적당한 수준이다. 살면서 알게 되었는데 나는 수학, 특히 숫자 감각에 상당한 비교우위가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잘 활용해서 인생에 멋진 무언가를 해 놓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지금도 있다.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수학에 대한 재미와 열정을 참았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 위에 새로운 버킷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삶의 태도를 정해 본다. 계속 열심히 살아서 내 안의 감각을 계속 날카롭게 벼리어 가야 한다. 열정을 갖고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도전한다. 그리고 중년답게 무심해야 한다. 어떤 일의 결과는 열심과 열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무심이야 말로 열심과 열정이 지난 다음에 오는 멋진 경지이다.
조용히, 무심하게
<58세의 버킷리스트>
1. 공부: 사이버대학 졸업 및 자격증 취득 (한국어교원, 다문화사회 전문가)
2. 봉사: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지원
3. 글쓰기: 에세이와 소설 쓰기 및 책 발간
4. 전원생활: 집사람과 좋은 시간 만들기
5. 노래: 동문합창단 총무 일 잘 하기
6. 기타: 베이스 기타 레슨 후 친구들과 밴드 만들기
7. 골프: 골프생활체육지도사 도전, 친구들과 좋은 관계 이어 가기
8. 일: 현재 하는 일 정년까지 잘 마무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