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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진 May 04. 2023

행복한 시지프스를 꿈꾸며


 일곱 살쯤이었을까. 잠을 청하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불안함이 엄습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녀린 소년을 덮치는 것이었다. 죽으면 잃게 되는 것이 수없이 많겠으나,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거리였다. 그러나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찾아온 것은 예상과 달랐다. 내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가을에 아버지는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랍게도 뼈를 깎는 아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쳇바퀴 도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역시 인간은 무엇에든 적응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적응치 못해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왜 사는 것인가?’ 어떠한 문제가 다른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고 판단하는 척도로서 나는 그 질문에 따라 마땅히 실천하게 되는 행동을 살펴보곤 한다. 앞서 이야기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애쓰는 나의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정신적으로 침식하다가, 불현듯 급진적인 희망에 활력을 얻어 몸부림치지만, 끝내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좌절하고 마는, 참으로 암담하고도 고통스러운 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에게 참으로 절박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단속적으로 나를 쓰러뜨리는 절박함 앞에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인생이란 본디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명제를. 근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서른 살에 죽느냐 예순 살에 죽느냐는 내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둘 중 어느 경우가 되었든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그저 살아갈 것이고, 수천 년 동안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이든 삼십 년 후든 언제나 죽는 것은 결국 나이다.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살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문득 마음 속에서 소름끼치는 그 무엇이 솟구치지만, 삼십 년 후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돌연 삶은 나름대로 살아갈만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나는 어차피 죽는다는 사실이며, 그렇기에 언제 죽느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럼 당장 죽어버려도 상관없는가. 아니다.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분명 고된 일이나, 그 과정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더욱 힘들고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저 살아내야 한다. 삶은 원래 알 수 없는 것이며,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삶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무엇을 좋아했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격렬히 반항하고자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비록 해답의 본질은 찾지 못할지라도 해답의 허상이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백수에게는 백수 탈출이, 직장인은 승진이, 상인은 대박이, 엄마에겐 자식 잘됨이, 싱글은 사랑과 밍글하는 가슴 속 설레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 역시 언젠가는 모두 덧없이 스러져버릴 터이나, 본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것 가운데 군림한다. 영광이란 모두 덧없는 것이다. 모든 영광 중에서 가장 덜 거짓된 것은 스스로 체험하는 영광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


 이렇듯 나를 살게하는 것은 불연속적으로 이따금씩 생겨나겠으나, 근본적인 자기 존재의 목적이나 이유는 결국 없는 셈이다. 나는 고귀한 희생이나 숭고한 인류애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그저 오늘을 살고자 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온 피부로 의식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 비로소 나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거나 기대하며, 더 이상 왜 살아가는지 자문(自問)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유의 전제에 매인 채 그 환상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던 것이다.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믿는 것은 나의 선택이자 의지이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구축한 세계를 믿는 것을 선택한다. 덧없는 삶을 인정하고 그것에 반항하기 위해 세상에 나를 내던진다. 나의 삶, 반항, 그리고 자유를 느끼기 위함이다. 카뮈가 말했듯이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나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꿈꾼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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