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벽을 허물고
출발한지 2시간 만에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이 이렇게 가까웠나, 싶었다. 일본은 뉴질랜드로 가기 위한 경유지였기 때문에 당초 여행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이왕 가는 김에 하루 더 일찍 가서 시내를 조금 구경하고 갈 생각이었다.
여느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일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한일간 여러 이슈를 계속 접하다보니 내가 갖고있던 부정적인 인식을 일반화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면서 또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혐한 테러를 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마음의 벽, 허물어지는데 하루면 충분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여러 교통수단 중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게이세이 열차를 선택했는데, 표는 어찌어찌 구입했지만 탑승구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총 30킬로에 달하는 짐을 앞뒤로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헤매다가 결국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역무원은 내 표를 보고 치가우!! 치가우!!를 반복하며 일어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대충 무언가가 틀렸다는 내용 같았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것뿐이었다. (이 기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통한다는 것을 후에 깨달았다) 역무원은 안간힘을 쓰며 학교에서 배운 것 같은 영어 단어들을 구사해보았으나, 이내 빠르게 포기하고 그냥 나를 탑승구까지 데려다주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있게 영어 한마디를 구사했다. ‘히어!(Here)’ 알고보니 내가 게이세이 라인이 아닌 스카이라이너 탑승구에서 헤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했던 모든 나라 중에서 내겐 일본이 가장 어려웠다. 안내판에 간간히 있는 영어나 한글이 없으면 답이 없었다. 한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며 일어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었다. 비슷한 건물, 비슷한 사람, 그러나 언어적 이질감을 매우 오랜만에 느껴보면서 긴장되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론 이런 상황이 다이내믹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 안에서 미끄러지는 풍경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라 보이는 점도 있었다. 산이 없고, 군데군데 울창한 숲도 보였으며, 유달리 논밭이 눈에 많이 띄었다. 열차 내부 구조도 우리 열차와 거의 비슷했다. 광고판에 일본 특유의 그림체와 커다란 한자만 없으면 한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릴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풍경을 보다가 이번엔 열차 안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옆에 어떤 유치원생이 앉았는데, 발까지 내려오는 네이비 교복을 입고 위에 뭉툭 튀어나온 노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흡사 병아리 같아서 너무 귀여웠다.
내 건너편에 맥북을 꺼내들고 열심히 일하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내 옆자리가 비자 갑자기 나한테 손바닥을 일자로 들더니 여기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곤 앉았다. 알고보니 내 옆의 옆자리에 그분의 딸이 앉아있었다. 일본 특유 제스처인 듯 하여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일어로 뭐라뭐라 얘기했다. 난 한국에서 왔다고,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하니, 이내 영어로 어디로 가고 왜 왔는지 물었다. 1년간 여행을 이제 막 시작했고, 일본이 그 첫 번째 여행지라고 답하자 더욱 흥미로워하면서 말문이 트였다.
본인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막 졸업해서 귀국했고, 독일에서 연구원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분의 딸도 소개시켜 주셨는데, 매우 이국적인 미모여서 심쿵할 뻔했다. 도란도란 얘기하다가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탑승하셔서 자리를 양보해드렸더니, 아저씨가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계속 칭찬을 하길래 너무 쑥쓰러웠다.
그러다 아저씨는 이것도 인연인데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다. 하지만 난 이미 저녁 일정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초대 감사하다고 하자 갑자기 시무룩해지셨다.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저씨 표정이 다이내믹해서 웃기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던 딸이 헤어질 때가 되자 내게 명함을 주고 갔다. (그리고 그 명함은 여행 보물 1호가 되었다.) 아저씨(특히 따님)과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날 따라 도쿄 시내는 주룩주룩 비가 왔다. 내 숙소는 게이세이우에노 역 인근에 있는 캡슐호텔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이 역은 어감이 좀.. 이런게이세이우야노) 말로만 듣던 캡슐호텔에서 자볼 생각을 하니 들떠 있었다.
그런데 또 길을 잃었다.
구글맵이 먹통이어서 남은 것은 주소 밖에 없었다. 다행히 미리 숙소 지도 캡쳐를 해둔 것이 있어서 동네방네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 장소가 마침 시장판이었다. 결국 다시 녹초가 되어서 길거리 장사를 떠들썩하게 하는 아저씨한테 주소를 보여주었다. 또다시 들려오는 외계어. 눈꼬리를 흐린 채 입을 헤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손짓발짓과 영화에서 봤던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서 소통해보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열심히 설명해보려고 애쓰던 아저씨도 할 도리를 했으니 그냥 별수 없다고 하고 모르는 척 하면 될 걸. 아저씨는 기어이 장사를 놔두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난 영문도 모른 채 질질 끌려갔다. 이끌려가보니 근처 파출소. 아저씨가 뭐라뭐라 순경에게 부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흔든다. 잘 가라고. 오호라, 오늘 숙소는 캡슐호텔이 아니라 구치소로구나! 순경이 따라오라고 손짓해서 졸졸 따라가봤더니, 골목길에 그 숙소가 나왔다. 이 망할 숙소를 찾느라 거의 1시간을 소비했다. 그냥 무시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장사판을 놔두고 파출소까지 같이 가서 부탁해준 그 아저씨도, 안내해준 순경 아저씨도 고마웠다.
숙소 주인은 깐깐한 편이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는데, 보통은 비어있는 방을 내주지만, 이분은 시계를 코앞에 들이대면서 체크인 시간이 안되었다고, 단칼에 잘랐다. 짐을 리셉션에 놔두고 돌아다녀볼까,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안된다고 한다. 별수 없이 몇 십분 더 기다려서 겨우내 체크인을 했다.
막상 들어가보니 무슨 관짝같은 호텔이었다. 내 객실은 위에칸이었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깔끔하고 세상 아늑했다. 나같이 돈 없는 배낭여행객에게 이와 같이 저렴한 1인실은 행운이자 호사였다.
숙소가 좋아도 늘어질 틈이 없었다. 중요한 것만 챙겨서 바로 나왔다. 우에노 역 근처를 느긋하게 돌아보고 올 참이었다.
도쿄의 골목길은 묘하게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간판만 한글로 바꾸면 감쪽같을 것 같았다. 다만, 여기가 일본임을 상기시켜주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그건 심심찮게 보이는 고풍스러운 기와 건축물들과 전통의상을 입은 일본인들이었다.
비 오는 도쿄의 정취를 느끼며 걷다가, 문득 비를 피하러 절로 들어온 두 여자아이들을 보았다. 한 아이는 다행이라는 듯이 배낭을 풀고 한숨 돌리는데, 다른 아이는 배낭을 내리고 공손히 작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한숨 돌리던 아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자기도 배낭을 풀고 옆에 서서 같이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뉘집 딸래미인지 몰라도 교육을 참 잘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보니 아사쿠사까지 오게 되었다. 입구 중앙에 향이 피어오르는 향로가 있었는데, 이 향이 어떤 복을 가져다주는지 사람들이 손을 저어 그 향을 들이마쉬려고 했었다. 주변에 기념품 가게들이 기모노, 나막신, 익살스러운 가면, 손을 젓는 고양이 등을 팔고 있었다.
중간에 무협 만화에서 나올법한 삿갓 쓴 승려도 보았는데, 마치 선혈이 낭자했던 자신의 과거를 뒤로하고 살생을 금하기로 작정한지 1000일이 임박한 전설의 검객 같이 보였다.
기념품 가게를 보시던 기모노를 입으신 할머니도 보았는데, 무언가를 만드는데 골똘히 집중하시는 모습이 마치 꽃밭 한가운데에서 책을 읽는 소녀 같았다.
발길을 돌려 다다른 아키하바라 역은 또다른 세상이었다. 복잡한 네온사인 간판들과 내가 어렸을 적에 즐겨했던 게임의 로고, 세가가 대문짝만하게 찍인 건물도 있었다. 들어가보니, 분명 오락실인데, 내가 90년대 가봤던 오락실 수준이 아니었다. 최첨단 게임방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다양한 동작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이머들의 성지였다.
이외 별의별 피규어도 볼 수 있었는데,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만화 캐릭터가 화면을 찢고 나온 미친 퀄리티였다. 이래서 일본 피규어에 일명 ‘환장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가격도 물론 미쳤다. 한번 빠지면 1억은 거뜬히 나갈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이 나라 사람들은 각자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팬심을 갖고 있는 듯 했는데, 캐릭터 그림에 붙여놓은 팬들의 메모장을 보면 다들 그림을 수준급으로 잘 그리는 것 같아서 놀랐다. 마치 본능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듯 했다.
열심히 돌아다니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식사할 때가 되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보니 셰프 앞에 테이블이 주욱 연결되어있는 일본 식당 특유 구조였다. 나도 한자리 차지해서 우동 세트를 주문했다. 녹차는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었는데, 그 맛은 정말 기가 막혔다. 순식간에 나온 우동 세트와 가볍게 튀긴 해산물. 일단 튀김새우를 베어 물으니 새우가 마치 내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유레카! 유레카!! 아르키메데스와 같이,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맛있다고 소리쳐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맛이었다. 살다살다 그렇게 튀김새우가 싱싱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눈을 몇 번 감았을 뿐인데. 내 앞에 빈 그릇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허기가 졌던 터라 더욱 맛있었다.
일정의 마무리는 도쿄 스카이트리였다. 고층에서 도쿄의 야경을 죽 보니, 산이 없어서 그런지 도쿄는 생각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메가폴리스였다. 빽빽이 늘어선 빌딩과 건물을 보니, 사람들이 왠지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여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화려하나, 유달리 외로워보이는 도쿄의 야경이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복귀해서 내일 출국 전 짐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결국 일이 터졌다.
항공권 구입용 신용카드를 분실한 것이다.
아니겠지, 아닐거야라고 되뇌이며 온몸과 짐을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야단이 났다. 아니 왜 첫날부터?! 내가 그러면 그렇지. 누가 훔쳤는지, 길바닥에 떨어뜨렸는지 전혀 모를 일이었다. 일단 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카드 정지시키고 짐을 샅샅이 뒤졌다. 긴장이 되다보니 땀이 뻘뻘 났다. 숙소 주인이 리셉션 구석에서 2시간동안 온 짐을 풀어헤치고 있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나한테 와서 씩 웃으며 물병을 건네주었다. 서비스라며. 근데 그 미소가 되게 사악해보였다. 뭐지? 물에 독이라도 탔나? 아까 그렇게 깐깐하게 굴던 주인이 나한테 공짜로 물병을 주다니.
나도 씩 웃으면서 한숨 돌리고 물을 들이켰다. 엄청 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잃어버릴 수 없었을텐데. ...혹시 내가 잃어버릴까봐 숨겨둔 건 아닐까?
이 생각에 배낭 안쪽 주머니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딱딱하고 뭉툭한 것이 손에 걸렸다. 꺼내보니, 그 카드였다. 아놔... 카드사에 또 바로 전화해서 정지한 것을 취소했다. 세계일주 첫 날부터 길도 잃고 카드도 분실하는 등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느낀 것은 많았으나 너무 짧았던 도쿄에서의 하룻밤이었다. 다시 공항에서, 몇 시간씩 지연된 뉴질랜드행 비행기 덕분에 바닥에 앉아 긴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게 일본이 밉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밉다고 하겠다. 독도는 우리 땅인데 자꾸 넘보지, 역사는 왜곡하면서 우리에게 아픈 과거사는 인정도 사과도 안하지. 난 여전히 유니클로 옷은 사 입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에 다시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100, 아니 200% 다시 가고 싶다고 하겠다. 다시 가서 묘한 순수함과 설령 가식적이더라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 일본인들의 친절함을 나는 기꺼이 다시 맛보고 싶다. 이것이 내가 그날, 단 하루만에 걸려버린 일본의 ‘마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