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욕망과 결핍은 모순관계)
앞선 포스팅에선 이야기의 성립조건 중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변화’는 비유하자면 일종의 틀이다. 이야기라는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거푸집이다. 하지만 구조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순 없다.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 ‘변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주조해내기 위해 거푸집에 부어야 하는 원료는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인물이다. 인물은 이야기의 중심 동력이다. 우리는 이야기들을 접할 때 관습적으로 각 항목의 돌출 정도에 따라 캐릭터 중심, 플롯 중심, 장르 중심 등으로 범주화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편의상의 구분을 차치하고 분석해보면, 결국 모든 이야기는 변화라는 축을 중심으로 직조된다는 규격상의 특성 때문에 캐릭터 중심의 구조물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결국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포스팅을 복기해보자. 이야기적 ‘변화’의 특징은, 그것이 항상 중심인물의 변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변화는 행동의 변화일수도, 인식의 변화일수도, 인물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일수도 있지만, 핵심은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은 중심인물의 ‘욕망’이며, 따라서 이야기적 인물의 모든 특성은 그러한 욕망에 기인해야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야기적 인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욕망과 결핍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은유이듯, 이야기의 인물 또한 실제 존재하는 인간 군상의 은유이다. 이야기적 인물은 대표성을 띈다. 창작자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 속성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 때문에 이야기적 인물을 만들기 위해선 실제 인물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그쳐선 안 되고 모종의 가공절차가 필요하다. 가령 실제 존재하는 인물의 A to Z를 낱낱이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이야기적 인물을 완성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 폭넓게 선택지를 고려해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최종적으로 인물을 구상할 때는 필요한 정보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구분하고 불필요한 정보는 소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정보는 어떤 기준을 통해 구분하는가. 이야기적 인물에 중요한 것은 사실성이 아니라 논리성이다.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는 일관된 논리구조 하에서 하나의 구심점으로 수렴할 수 있게 배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심점, 바꿔 말해서 인물이 이야기적 인물로 기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욕망’이다. 이야기적 인물의 구상은 욕망을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욕망은 동적이다. 욕망이 주인공을 움직인다. 주인공은 일관되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런데 욕망은 욕망만으로는 기능할 수 없다. 앞선 포스팅에서 이야기를 두고 주장하는 글과 같은 구조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변증법적인 논증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의 욕망에는 언제나 안티테제가 따른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욕망이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서서히 결론에 다가간다. 이러한 장애물을 두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결핍’이라고 일컫는다. 주인공이 결핍을 이겨내고 끝내 욕망하는 바를 성취해낸다면 해피엔딩, 결핍을 결국 극복해내지 못하고 패배한다면 새드엔딩이 된다. 그런데 결핍은 단순히 주인공의 욕망을 훼방 놓는 데 그쳐선 안 된다. 결핍이 성립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요점은 결핍이 안티테제라는 것이다. 결핍은 욕망에 상충한다. 결핍은 주인공의 욕망을 정반대로 가로막을 때 비로소 결핍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결핍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악역이다. 선과 악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관습적인 드라마에서 선역(주인공)이 욕망하는 바는 악역의 훼방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다. 결핍의 또 다른 흔한 예시는 트라우마이다. 주인공이 무언가 행동하려 할 때마다 내면의 트라우마가 발현되어 번번이 훼방 놓는다. 인물 속에 내제되어있는 트라우마는 역으로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욕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는 결핍이 욕망에 선행한 경우이다. 이렇듯 결핍과 욕망은 양방향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모순 관계로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모순이 이야기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수용자로 하여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예로 들어보자. 치히로는 우연한 계기로 신들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이에 치히로는 현실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왜?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해버려 알아볼 수도 없고, 치히로 자신도 신들의 세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점차 스스로의 이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은 그 자체로 주제를 나타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행방불명되는 것은 자아이다.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채 서로 식별 불가능한 획일화된 삶을 살고 있고, 이름을 잃는 순간 우리는 독재자(극 중의 유바바, 독재자의 의미는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왜?’에 대한 답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아를 보존하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10살짜리 소녀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결국 아직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은 아이가, 자신(아이)만의 방식을 통해 어른들을 구출해내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욕망과 결핍은 수용자에게 이야기의 핵심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이 원하는 게 뭘까? 왜 주인공은 그것을 성취하지 못할까? 그렇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주인공을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좇는 과정에서 수용자는 결국 이야기의 주제와 마주하게 된다.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
이야기의 재료들이 실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현상이어야한다기보다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에 더 가깝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욕망은 두 겹의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외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기저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내적 욕망)이다. 전자는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해 구체화되지만 후자는 그러한 행동을 발현시키는 근원적인 힘으로써 작동된다. 두 개의 욕망은 서로 일치할 때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원하는 진정한 이유가 다른 경우에는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 일치하지 않는 인물이 된다. 예컨대 형사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야기 속 형사의 외적 욕망은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두 형사들, 박두만과 서태윤은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 일치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범인을 검거하려고 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직업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범인 검거를 통해 이루려는 무언가 감춰진 속내 따윈 없다. 때문에 그들의 결핍 또한 외부적인 곳에 자리한다. 박두만과 서태윤이 범인을 잡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직업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사로 하여금 범인을 쫓게 만드는 동기가 반드시 직업적 소명의식이라는 법은 없다. 영화 <배드 캅>의 주인공(이름 없음)은 부패한 형사이다. 그는 마약에 손을 대고, 도박을 위해 갱의 돈을 빌리고, 길 가던 여자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희롱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녀가 윤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조사에 착수하지만 수녀는 이미 범인들을 용서했다고 단호하게 못 박는다. 수녀의 말을 듣고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타락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즉 이야기적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 주인공은 욕망을 갖게 된다. (이야기적 사건의 요건은 주인공에게 욕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층위의 욕망이 모두 포함된다. 그는 이제 ‘범인을 찾아내고 싶다.’는 외적 욕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왜 그는 범인을 찾아내려 하는가? 그간의 행적을 봐왔을 때 이것이 응당 직업의식일리는 없다. 그가 범인을 잡으려 하는 이유는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범인을 구원함으로써 그는 범인이 자신과 같이 타락한 삶을 살지 않게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욕망은 궁극적으론 스스로에게 향해있다. 그는 간절히 스스로를 도덕적 타락의 상태로부터 구원(용서)하고 싶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범인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이나 대사들은 사실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내적 욕망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수녀를 윤간했던 두 소년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이 수녀로부터 용서받았음을 전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게 만든다. 새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자신의 악행에 대해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소년과 달리) 자신을 용서해줄 이가 없다는 것, 구원받을 여지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그의 결핍이다. 즉, <배드 캅>은 결핍이 욕망을 이기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욕망은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라는 층위로 구분된다. 둘은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동기는 내적 욕망이기 때문에, 인물의 결핍은 외적 욕망이 아니라 내적 욕망과 상충한다.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 같다면 결핍 또한 외부에 있다. (<살인의 추억>의 예시를 떠올려보자.)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 다르다면 결핍은 인물의 내면에 있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입체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후자가 우위를 점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자의 인물을 활용할지 혹은 후자의 인물을 활용할지의 여부는 철저히 창작자에 의도에 달려있다. 복잡한 심리, 도덕성, 트라우마 등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만들 때는 후자의 인물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예컨대 <살인의 추억>처럼, 이야기의 외골격, 즉 구조나 배경 등이 핵심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 때는 전자의 인물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살인의 추억>에서 인물들의 결핍은 외부적인 데 있다. 그들은 형사로서 무능하다. 하지만 왜 무능한가? 무엇이 그들을 무능하게 만드는가? 주인공들의 무지와 무능의 원인을 찾던 관객들은 결국 계속해서 희생자를 양산해내던 시대의 결함과 마주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은 흰 도화지 같은 인물상이다. 그들은 평면적이기에, 즉 자기 의식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지 않기에 시대(배경)가 불순(不純) 없이 투사된다. 감독이 생각하는 당대의 결함들, 수사방식의 한계, 군사정권 치하의 약자에 대한 권위적인 탄압, 배척받는 여성성 등이 인물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이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인물은 곧 시대이고, 주인공들에 이입하던 관객들은 최종적으론 인물에 투영된 시대상을 읽어내게 된다. 이렇듯 자신이 부각하고자 하는 요소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적합한 유형을 선택해 인물을 창조해내야 한다.
인물의 디테일
욕망과 결핍을 설정했다면 이제 디테일들을 채워 넣을 차례이다. ‘변화’에 대한 포스팅에서도 설명했듯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은 실재적이어야 한다.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인물의 모든 특징들은, 심지어 성격이나 가치관, 윤리의식 등 실체가 없는 특성들 또한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를 설계할 때는 추상적인 문장들은 되도록 활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컨대 ‘성격이 급하다’, ‘착하다’, ‘폭력적이다’, ‘낯을 가린다’, ‘마음이 여리다’ 등의 문장은 이야기적이지 못하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나간다고 생각하자. 성별, 나이, 직업, 습관, 외모, 가족관계, 인물관계, 옷차림, 말투, 사는 곳, 방 풍경, 취미, 식습관, 취향, 학력, 지병 등과 같은 실질적인 특성들을 고려해보자. 어떤 특성을 강조할지의 여부는, 마찬가지로 그 특성이 얼마나 인물의 욕망과 결핍을 순도 높게 표상하는지를 척도로 결정되어야 한다. 모든 특성이 유효한 쓰임새를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는 인물의 디테일이 핵심인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을 맺는 순간까지 인물의 디테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예컨대 <로제타>는 제목부터가 등장인물의 이름 그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목은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표방하고, 바꿔 말해서 <로제타>는 주인공 ‘로제타’가 곧 전부인 영화이다. 모든 영화적 요소들이 ‘로제타’의 비극적 삶을 구석구석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할애된다. 앞선 문단에서 나열했던 인물의 특성들을 위주로 살펴보겠다.
나이, 성별, 가족관계, 사는 곳
로제타는 18살 여자이다. 어머니는 알코올중독자이며, 경제적 무능 상태로 사실상 로제타에게 얹혀사는 신세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한다. 로제타와 어머니는 홈리스로,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캠핑장 트레일러촌에서 살고 있다.
직업
영화는 로제타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수습기간이 끝난 직후 해고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영화에서 로제타는 여러 개의 욕망을 갖고 있지만, 이야기 진행에서의 핵심 욕망은 ‘직업 구하기’이다.) 이후 와플공장에 취직하지만, 퇴학당한 사장아들의 취업을 위해 다시 해고된다.
인물관계
로제타는 와플공장에서 짧은 기간 일할 때 ‘리케’를 만나고 친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와플공장에서 해고된 후, 복직을 위해 ‘리케’가 몰래 와플을 팔아 이윤을 취했던 것을 고발한다. ‘리케’는 해고되고 로제타는 ‘리케’의 자리를 대체한다. 로제타는 친구를 다시 잃는다.
습관
로제타는 텀블러에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텀블러의 입구가 마치 젖병처럼 생겼다. (사진1) 로제타가 갈증을 느끼며 텀블러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에서 관객은 로제타의 모성에 대한 결핍을 읽어낸다.
행동
로제타는 궁지에 몰리면 누군가를 공격한다. 직업을 잃을 때는 통보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일자리 또한 ‘리케’를 밀고하는 방식으로 되찾는다. 이제 로제타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을 위협하는 ‘리케’의 공격을 받는다.
또한 로제타는 늘 무언가 무거운 것을 짊어진다. 와플공장에서 맨 처음 할당받았던 업무는 밀가루포대를 통째로 들어 반죽기계에 붓는 것이었고(사진2), 집에서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를 짊어져야 하며(사진3), 취사에 필요한 가스통을 구입해 트레일러까지 들고 와야 한다(사진4). 로제타는 안간힘을 쓰고 가스통을 들어 올리지만, 몇 번이고 떨어뜨리고 만다. 이렇듯 영화는 무언가 짊어지는 행위를 통해 로제타에게 가해지는 삶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옷차림
트레일러촌은 강가에 있다. 때문에 주변 길을 온통 진흙투성이이다. 로제타는 일하러 시내로 나갈 때는 운동화를 신지만, 트레일러촌에 들어서려면 진흙에 발이 빠지지 않게 장화로 갈아 신는다. 그리고 벗어둔 운동화를 배수로 깊숙한 곳에 소중히 숨겨둔다. 이렇듯 로제타가 욕망하는 삶과 현재의 삶은 각각 운동화와 장화로 상징을 통해 대비된다.
로제타의 욕망은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범한 삶의 요소들은 로제타가 갖지 못한 것, 예컨대 직장, 집, 친구,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말하며, 이것들은 곧 로제타라는 캐릭터의 결핍이다. 바꿔 말해서 로제타의 결핍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 그 자체이다. <로제타>는 결핍이 욕망에 선행하는 이야기이다. 결핍들이 로제타의 욕망을 잉태한다. 로제타는 직업을, 친구를, 어머니의 사랑을 손에 넣고 싶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로제타의 모든 요소가 그러한 욕망과 결핍을 실재적으로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예컨대 로제타에게 반드시 밀가루포대를 짊어지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에게 부과된 삶의 무게를 시각화하기 위해 밀가루포대 나르는 직업을 ‘선택’했다. 트레일러촌이 반드시 강가에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장화를 신기기 위해 진흙탕 길을 ‘선택’했다. 이렇듯 모든 요소들은 욕망과 결핍을 전달하기에 효과적인지 여부에 따라 선택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욕망과 결핍이야말로 이야기적 인물의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