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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May 11. 2022

분노라는 파도에서 서핑하기

시류에 몸을 맡기기 (1/2)

요즘 나는 크나큰 고민에 빠져있다. 도대체 시간만 나면 앉아서 가족을 생각하며 땅바닥을 파는 것 때문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나와 비슷하게 부모복이 없는 사람을 보면 정말 그렇게도 애처로울 수가 없다. 의사 선생님도 이거 고치는데 적잖이 시간이 들 거라고는 했지만... 도대체 언제쯤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며칠 전 어버이날 기념으로 집에 누워 오랜만에 엄마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들여다보았더니, 데이트 어플에나 올릴법한 날티나는 차림새를 하고 찍은 사진이 올라와있었다.


왜 하고 많은 비유 중에 데이트 어플인가? 그것은 애석하게도... 내 부모가 정말 그걸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와의 절연에 아주 큰 몫을 했다. 아직도 저렇게 살고 있구나... 어이가 없어 좀 보다 치워버렸다. 그렇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 얼굴이 자꾸 언뜻언뜻 스쳤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웃기게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허망했다. 그 후에는 분노, 그 후엔 다시 슬픔. 그러다 다시 출근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자니 내 꼴이 참 웃기는 거다. 이럴수록 담백하게, 내 가정 사정을 아는 친구에게 이 얘기를 전하며 내가 그랬다.


'부모복레전드'


진짜 레전드다, 내 인생.




부모와의 절연이라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가. 아주 단순하게는 밤중에 울리는 전화와 문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크게 보면 내 삶을 내 뜻대로 결정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근데 결혼할 때는 어떻게 하지. 멀쩡히 살아있는 부모를 죽었다고 할 수도 없고... 정도의 감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남아, 나는 더 이상 나의 문장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어졌다. 자만하는 것 같고, 누군가 날 비웃을 것 같아서. 그래서 누구의 말에 따르면~ 혹은 누가 이렇다고는 했다, 하고 남의 말로 전하지 따로 내 감상이나 판단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저렇게 쿨한 척을 하면서도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그래서 이런 것도 했고 저런 것도 했고, 어린애처럼 사실을 잔뜩 들어다 남 앞에 쌓아놓으면 다들 휘둥그레서 날 쳐다본다. 내가 그렇게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돌려주는 너 진짜 열심히 산다, 라는 그 말 한마디에 인생의 의미를 찾은 것 같던 날들도 있었다.


이게 왜 그런 걸까. 난 왜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걸까? 자괴감이 들 때마다 그 근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부터 내가 무슨 상을 받든, 전교 몇 등을 하든, 좋은 곳으로 진학을 하거나 진로를 정할 때에도. 내 부모는 성취는커녕 내가 가진 비전, 계획에 대해서 한마디 칭찬을 해준 적도, 인정해준 적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사치 같은 것은 꿈꿔본 적 없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야도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전망이 좋은 직군이고, 내가 골랐다. 왜냐면, 좋아하는 일에 발을 들였다가 나이가 들어 경력단절이 된 엄마가 나에게 평생 전망 좋은 직종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아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극한의 안정 추구형 인간인 나는 비슷한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태 어딜 가든 딸 잘 키웠다, 대단하다. 그런 말을 듣게 해 줬다면 내게 한 마디 칭찬쯤 해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원망이 있다. 그리고 그에 한 발짝 더 나아가,


난 그 칭찬에 목말라 이렇게까지 헤매며 사는데. 누구보다 부모라는 존재의 인정을 바라왔는데. 내가 누구보다 두려워했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부모라는 존재가, 겨우 저런 사람이었다는 것이. 본인이 무시해 마지않던 그런 차림으로 저런 일상을 지내고 있다니. 프로필을 보고 정말 못 견디게 화가 났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숭고한 희생, 이런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의 도덕만 지켜주지. 날 다단계에 밀어 넣을 생각, 내게 불륜을 이해받을 생각 같은 것 하지 말고 자식으로서 보호해줬어야지. 어떻게 그 어린아이에게 그럴 수 있었나. 도대체 어떻게?


정말 파도 같은, 파괴력으로 치자면 쓰나미 급의 분노가 삽시간에 몰려왔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져 버린 화에 매몰되어서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정리하고, 똑같은 일을 가지고 수십 가지의 해석을 하며 내 마음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기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분노와 화 속에서 빠져나오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에 언제까지고 날 던져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본능적인 감정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도망가야 현명한 걸까. 아직도 뾰족한 수를 찾은 것은 아니나, 나는 열 번 중 여덟 번은 저런 생각에 지고 두 번은 이긴다. 그렇다면 이것도 성취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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