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작가 Mar 04. 2024

바다 쓰기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3. 바다

번 글쓰기 프로젝트 주제는 '바다'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이후

바다 쓰기로 스트레스를 받게 될 줄이야...


나에게 바다란?



#1. 유년시절


어린 시절, 나에게 바다는 '공포'였다.

이름도 잊히지 않는다. 가마미 해수욕장.

아버지와 형은 나를 튜브에 태워

발도 닿지 않는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무섭다고, 그만 들어가라고 아무리 소리쳐대도

둘의 괴롭힘 욕구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사악한 웃음소리, 큰 파도에 붕 뜬 느낌,

그리고 난 바닷속 깊이 처박혔다.

코로, 입으로 바닷물을 마구 들이키며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내가 그때 죽었다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으로 처리되었어야 마땅했다.


세월이 흐르며 약자였던 나는 강자가 되었고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아내와 애들을 괴롭히며

사악한 웃음을 짓곤 한다.

특히 바다에서는 사악함이 배가 된다.

아내와 아이들을 어깨에 둘러업고 바다로 돌진해

사랑한다는 외침을 열 번은 들어야 살려는 드린다.

하루라도 장난을 안 치면 목에 가시가 돋는

철없는 남편, 아빠를 둔 가족들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몇 년 전 아이들에게 진짜 싫은 장난이 뭐냐 물으니

수염으로 얼굴 비비기랑 깜짝 놀래키기라고 하기에

두 장난을 끊고 한동안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풍선효과처럼 애들에게 억눌린 장난이

아내에게 향하는 바람에 애꿎은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얼마 전 둘째가 놀래키기 금지령을 해제시켜 줘

매일 서로 속고 속이는 장난 배틀이 벌어진다.

아직 내 승률이 높다.)


요즘 아내는 내 장난에 놀라기보다는

날 측은하게 바라보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그래, 이 짓도 아직 건강하니까 하는 거지'라며

남편의 건강과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듯한 눈빛.

'이게 그렇게 하고 싶었어? 언제부터 숨어 있었어?'

라며 엄마의 마음으로 우쭈쭈 해주는 헤아림까지.

모든 걸 품어주는 바다 같은 아내의 눈빛에서

사랑과 전우애를 느낀다.

(정작 아내는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이겠지만...)


돌아보니 몇 년째 장난에 발전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방이 진짜 싫어하는 장난이 있는지

의견을 수렴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장난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앞으로 40년 이상 장난치며 살 텐데

어렸을 때 했던 장난에서 진일보하지 못했다.

소규모 장난부터 대규모 프로젝트까지,

단발성 장난부터 장기 프로젝트까지

창의적이고 신선한 것들이 많이 있을 텐데...

장난에도 R&D가 필요한데 이 부분을 놓쳤다.

장난을 당하는 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공포와 무력감을 주는 괴롭힘이 아니라

당하는 사람의 감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준 높은 장난을 연구해 봐야겠다.


바다에 대해 쓰려던 글이 결국

바닷물에 밀리듯 장난으로 흘러갔다.

선생님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다 쓰기가 장난이야?"



#2. 20대


어른들에게 당했던 공포의 바다는 잊혔다.

20대의 내게 바다는 '뛰어듦'이었다.

낮에는 바다로, 밤에는 헌팅으로...

(15~20년 전, 그때 그 시절 헌팅 노하우 공개)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천해수욕장에 갔다.

남자 다섯이서 노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음양의 조화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길 때였다.


우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목표물을 포착했다.

일부러 수박공을 그 방향으로 날려가며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우리에겐 대형 튜브보트가 있었고

친구들은 보트를 여성들 쪽으로 힘껏 밀었다.

난 트로이의 목마처럼 보트 위에 납작 엎드려 침투했다.

떠밀려온 보트를 다시 밀어주려고 여성들이 다가올 때

짠하고 나타나 외쳤다.


자~ 타시죠!
어디로 모실깝쇼~


꺅하고 놀라며 웃으면 성공이다.

공도 주고받고 보트도 태워주고~

뭐 별다른 것도 없는데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여자들의 웃음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말(수작)을 걸어본 게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큰 용기를 낸 거였다.

우린 젊고, 지금은 여름이고, 여긴 바다니까...

이미 여성들도 웃어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다.

우린 젊고, 지금은 여름이고, 여긴 바다니까...


적당히 놀고 나면 흥이 가라앉기 전에 재밌었다고,

다음에 또 보자며 쿨하게 헤어질 줄 알아야 한다.

우린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바란 건 그저 이렇게 공 주고받고 노는 것,

단지 이 은전 한 닢을 갖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순수함만 남긴 채 유유히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농부의 마음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이미지,

좋은 기억만 심어놓은 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에겐 대천의 밤이 있지 않은가...



  대천의 밤 헌팅에 대한 얘기는 내 책

<보통 아빠의 보통 아닌 육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육아서에 헌팅이 웬 말인가 싶겠지만

아빠의 헌팅 노하우를 아이에게 전수했다.

('친구 만들기 -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편에

언급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시길~

아마도 헌팅 노하우가 언급된 유일한 육아서일 듯)


아무튼 이때 스무 번 넘게 퇴짜를 맞고

잡상인 취급을 받으면서 난 레벨업이 되었다.

쭈뼛쭈뼛 숫기 없이 옹알이를 했던 나는

막판이 되어서는 퇴짜 맞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짝도 두꺼워지고 입도 트였다.


처음 말을 붙이면 돌아오는 첫마디는 대부분

"저희 일행 있어요~"였다.

그럴 땐 "잘 됐네요. 저도 일행 있는데"로 시작해

"한 번 오셔서 물만 보고 가시죠~"라는

나이트 삐끼 같은 양스러운 멘트도

능글맞게 날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제일 중요한 건 마지막 퇴짜의 순간이다.


"힘내라고, 꼭 성공하라고

파이팅 한번 외쳐주세요!"


"목소리 작다! 다시 한번 하나, 둘, 셋!"


길 한복판 난데없는 파이팅과 여성들의 웃음소리는

이목을 집중시키고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대천 바닥에 이렇게 홍보를 하고 다녀서  

다음에 다른 여성들에게 말을 걸 때면

"아까 파이팅 외쳤던 그분 아니에요?"라며

날 알아보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낮에 그랬듯 농부의 마음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리고 다녔고

덕분에 그날 우리는 음양의 조화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숫자도 딱 맞게 다섯 명의 여성들을

이끌고 나타난 나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그때 안 했으면 후회했을 무모한 뛰어듦.

그때의 추억을 술안주는 물론 책에서 풀어먹고

지금 또 풀어먹고 앞으로 또 어디서 풀어먹을지...

뭐든 눈 딱 감고 해 보면 술안주라도 생긴다.


나는 지금 무언가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나?

자신감을 갖고 뻔뻔하게 외쳐보자!


나는 아직 젊고,
지금은 OO이고,
 여긴 OO이니까!



#3. 30~40대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나이를 먹으며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바뀌고 있는 것 같다.

20대 때 난 바다 한복판에 있었지만

30대의 난 그늘막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애들 모래놀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40대의 난 횟집이나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온몸을 던지며 오감으로 느꼈던 바다였는데

바다 한번 쳐다보고 광어회 한점 먹으며

시각과 미각으로만 느끼는 바다가 된 건 아닌지

왠지 좀 서글픈 마음이 든다.


나이를 먹고,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몸도 마음도 예전같지 않다는 걸 인정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난 그게 잘 안 된다.


아직도 말장난, 물장난, 불장난을 하고 싶고

팔팔하게 해변을 뛰어다니고 싶다.

사회인 야구에서도 나이 들었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레슨을 받고 운동을 하며

아직 팀 에이스로 마운드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야구판을 접수할 생각만 하지

마운드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다.


난 젊고 건강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 같다.

다부진 몸, 활기찬 에너지, 늙지 않는 마음...

요즘 자기관리 실패로 살이 찌고 배가 나오고

어깨 팔꿈치 통증으로 구속이 줄면서

쌩쌩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세월을 거스르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지고 있다.


행동 변화는 없이 구호만 외치다

올해도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학기가 시작하는 3월,

만물이 소생하는 봄부터가 진짜지~


벌써 눈앞에 생생하게 보인다.

사실상 배 가리개 래시가드를 벗어던지고

구릿빛 탄탄한 몸으로 해변을 뛰는 내가.

마운드에서 뿌려대는 강속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타자들이...


철들면 죽는다는 신념으로 살았지만

이제 철 좀 들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헬스장에서 아령을, 레슨장에서 빠따를~

천재가 노력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어!!!


ps.  막판에 갑자기 급발진을 했다.

아버지 검진 때문에 하루종일 병원에서 대기하며

짬짬히 글을 쓰고 있어서 좀이 쑤시고

파닥파닥 날뛰고 싶은 욕구가

글로 분출된 것 같다.

평소에 잘할 것이지 꼭 병원만 오면 급발진이다.

양해 부탁드린다.


나는 아직 젊고
지금은 대기 중이고
여긴 병원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