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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Mar 14. 2024

그것만이 내 세상

<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5. 학교 가는 길>

졸업 후 모교를 다시 찾아간 건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초등학교로, 한 번은 고등학교로.

그때의 장소를 다시 찾은 것뿐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내가 보던 세상,

딱 그만큼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때로...



#1. 초등학교


내가 본 스케일이 이렇게 작았다고?


몇 해 전, 내가 살던 아파트를 찾아갔다.

1동 101호.

아파트 입구 첫 집이 우리 집이었다.

보물을 찾겠다며 매일 아파트 쓰레기통을 뒤지고

놀이터에서 땅을 파서 함정을 만들고

동과 동 사이 공간에서 주먹야구를 하던 곳.

지금은 놀이터가 철거됐고 공터 모든 공간이

지상 주차공간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다 해서 몇 대 대기도 힘든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자전거도 타고 야구도 하고 다방구, 나이먹기까지...

못할 게 없었던 내 세계가 이렇게 좁았다고?


빈 병을 열 맞춰 세워놓고 과자로 바꿔먹었던

추억의 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건 기억이 가물가물해도 이 슈퍼만큼은

내 집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아쉽네...


집에서 학교까지 등굣길을 걸어가 보았다.

수없이 깡패를 만났던 그 길.

골목을 지날 때마다 심장이 벌렁댔었지.

깡패를 피해 막무가내로 셔터문을 열고 들어갔던

나의 은신처 '옴시롱 감시롱 분식'도 없어졌고

천 원 주면 천백 원으로 바꿔주던 단골 오락실도,

손에 침 묻혀가며 뽑기를 하고, 것도 없으면서 매일

이것저것 둘러보던, 지우개 따먹기용 넓적한 지우개를

심사숙고하며 골랐던... 그 해태문구도 없어졌다.


멀게만 느껴졌던 학교 가는 길이

실상은 몇 분도 걸리지도 않는 짧은 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길을 걸으면서 잊고 지냈던

많은 추억들이,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들어섰다.

끝도 없이 넓어 보였던 운동장이었는데

공 한번 뻥 차면 학교 밖으로 날아갈 거리였다.

내가 살던 세상, 내가 보던 세상은

그토록 좁디좁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난 커서 뭐가 될 거라 생각했을까?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미래에 대한 걱정 하나 없이

하루하루 놀 궁리만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얼굴은 시커멓게 타고, 손등은 다 터서 일어나고

밤까지 숨바꼭질을 하며 알차게 하루를 보내고도

이제 좀 들어오라고 애타게 나를 부르는 할머니께

"5분만요~"를 남발하고 인저리타임까지 챙겨가며

필사적으로 놀았던 나.

그랬던 내가 벌써 사십 대 중반이고

그때의 나보다 더 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는 게

비현실적이기도,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기도 했다.


난 참 복 받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라는 개념이 남아 있던 훈훈했던 시절부터

익명성 보장된 아파트에서 개인화된 삶,

"00야, 놀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놀던 시절부터

핸드폰 속 세상에서 따로 노는 디지털의 삶,

풍족하지 않았지만 다들 고만고만했던 시절부터

풍족하지만 남과 비교하며 불안을 자초하는 삶까지...


옛날 사람도 아니고 요즘 사람도 아닌,

X세대와 MZ세대 그 사이 어딘가에 낀 세대.

하지만 그 중간 다리가 될 수도 있는 세대,

옛날 감성부터 요즘 감성까지 풍부하게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문화적 혜택을 받은 세대인 것도 같다.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추억할까?

아파트, 학원, 핸드폰 게임...

그 와중에 뭔 추억이 얼마나 있을까 안타깝다가도

이렇게 꼰대가 되는 건가 화들짝 놀라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나름의 낭만이

있을 거라 믿고 얼른 꼰대 마인드를 집어넣는다.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떻게 커 갈까?

어릴 적 하루종일 놀기만 하던 아빠도

어떻게든 사람 구실하면서 살고 있는 걸 보면

아이들도 알아서 자기 살 길 찾아 잘 살아가겠지.

내가 계획대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듯

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걱정하고 계획한다고

그게 큰 영향을 줄 변수가 될 것 같진 않다.


돌아보니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큰 영향을 줬던 건

어린 시절 놀며 알게 모르게 배우고 쌓였던 것들이었다.

인간관계, 갈등해결, 모험심, 눈치, 친구, 정서들...


가끔 아이들에게 얘기한다.


모험도 해보고 사고도 쳐보고 다 해봐~
그런다고 큰일 안 나~
뒤에 엄마 아빠가 있잖아~


아이들이 마음껏 활개치고 뛰어놀며

자기가 보는 세상의 반경을 넓혀 가길...

사고를 칠 거면 되도록 빨리 쳐주길...

(지금 사고 치면 수습 가능할 수준이겠지만

더 커서 사고 치면 아빠도 감당 안 된다이~)



#2. 고등학교


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꿈도 없었고

내 적성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었다.

그저 학교라는 틀 안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 믿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생각 없었던 것치곤 잘됐다.

운이 따랐고 그나마 성실하게는 살았던 덕이다.

직장에 들어와서도 늘 내 길이 아닌 것 같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옷이지만

오래 입다 보니 편한 옷이 되긴 했다.)


직장 그만두고 뭘 하면 좋을까 고민했고

막연히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아버지, 엄마, 아내까지 내 주변엔 늘

좋은 선생님이 있었고 나 역시 학원강사를 했을 때

보람을 느꼈고 아이들도 나를 잘 따랐다.

직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수능을 다시 볼까? 늦진 않았을까?

그러던 중 현실적이고 절충 가능한 안이 떠올랐다.


'강사'가 되고 싶다.


학위도 없고, 전문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나.

무모했지만 꿈이 생기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나만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싶어 졌고

일상을 곱씹으며 무언가를 캐치하고 싶어졌다.

날 괴롭혔던 직장 상사, 민원인, 떨어지는 사건들이

먼 훗날 내가 강단에 서서 얘기할 수 있는

멋진 스토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꿈을 가진 이후 나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때 했었더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고 성적 올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무작정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수업 한 시간만 빼주실 수 있을까요?

후배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뜬금없는 제안에 선생님이 물으셨다.


"너한테 한 시간 내주는 건 상관없다만...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여?"


인생 선배로서 느꼈던 것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눠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갑자기 왜 할라고 하는 거여?"


졸업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선생님의 돌직구 화법은 여전하셨다.

강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뭐여, 애들 데꼬 연습할라고야~

요즘 애들은 선배라고 말 안 들어야.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물려주고 이야기해라이~"


아무 준비도, 콘텐츠도 없이 패기 하나로 벌였는데

막상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책임감도 느껴지고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애들 소중한 공부시간 뺏지 않도록

준비 열심히 해야겠네요."


"글믄, 준비도 안 하고 올라고 했냐?"


마지막까지 돌직구다.


내 인생 첫 강의는 무보수로 내가 잡은 강의였다.

인천에서 광주까지 차비에, 선생님 선물에

음료수까지 하면 오히려 돈깨나 든 강의였다.



다시 찾은 고등학교는 의외로 낯설었다.

미리 도착해 운동장, 기숙사, 학교 복도

여기저기를 거닐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다시 찾은 모교. 느낌이 이상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회시간에 똥을 참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 이 계단을 건넜다. 결국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중 전교생 앞에서 똥 참다 쓰러짐.
내가 살던 기숙사. 이 앞에서 아침 조회도 했는데... 이렇게 감옥 같았나?


교무실, 교장실까지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사회선생님이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더 잘 되어서 금의환향했어야 했는데...

일반 직장인이 뭔 강의를 하겠다고...

살짝 민망함도 느꼈지만 선생님들은

전혀 민망하지 않게 날 반겨주셨다.


챙겨 간 아이스박스에 음료수를 가득 담아

어깨에 들쳐 매고 교실 문을 열었다.


"와~~"


역시 제일 반겨주는 건 후배들이었다.

음료수 때문인지 수업시간을 빼줘서인지...

반장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차렷, 선배님께 인사!"


강의 시작에 앞서 강의평가서를 나눠줬다.

강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몇 점인지,

기억에 남는 멘트, 좋았던 점, 고쳐야 할 점,

하고 싶은 말들을 강의를 들으며 작성해 달라고 했다.


이제야 강사의 꿈이 생겼고, 조금은 달라진 걸 느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도 좋지만

진로, 꿈,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걸

후배들에게 빨리 달려가 알려주고 싶었다고,

이 자리에 온 것도 내 꿈을 이뤄가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의 들으면서 냉철한 평가 부탁한다고 말했다.


PPT를 넘겨가며 준비한 말들을 시간 내에 마쳤다.

학교를 나와 길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에게 돌려받은 강의평가서를 꺼냈다.

내 인생 첫 강의, 아이들의 평가는 어땠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10점 만점을 줬다.

(나... 계속 강사 꿈을 키워도 되는 거야?)

나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고

단점으로는 자기만 음료수가 '봉봉'이었다는 아이,

목소리가 좋은데 계속 들으면

졸리는 목소리라는 아이도 있었다.


이때 내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며

무슨 일이든 상의할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연락이 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이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와의 시간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때를 기억하기나 할까?



이왕 광주까지 내려간 김에

고등학교 교사 친구의 학교까지 찾아갔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얻어 같은 내용으로 강의했다.

한 번 해본 거라 그런지 더 조금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때만 해도 날씬하네... 살 빼야겠다는 생각이 또...
선무당 치고는 괜찮았던...


이후 우연한 계기로 책을 내게 되었고,

강의 요청까지 들어와 강의도 하게 되었다.

전혀 다른 분야였지만 이때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뭘 계획하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을 일단 저지르고 본 거였는데

그게 알게 모르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순수한 열정과 패기 하나로 도전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 심장이 뛴다.

(이때 사진을 보고 내 앞에 놓인 거울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민아, 잘 좀 하자...)


나에게 말해본다.


모험도 해보고 사고도 쳐보고 다해봐~
그런다고 큰일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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