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글쓰기 프로젝트 #11. 연극>
난 꿈도 열정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하는 바가 뭔지도,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냥 성적에 맞춰 원치도 않는 전공을 택했고
이렇게 열정도 주관도 없이 인생을 허비해도
되는 건지 늘 불안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딱히 대안도 없었고 대안이 있다한들
방향을 틀 용기도 배포도 없었다.
그런던 중 <반칙왕>이라는 영화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
그는 운명처럼 프로레슬링 체육관을 마주한다.
상사의 헤드록을 빠져나올 방법을 찾기 위해
레슬링을 배우며 낮엔 찌질한 은행원으로,
밤엔 반칙왕 레슬러로 두 얼굴의 삶을 살아간다.
열정을 쏟으며 잃었던 활기를 찾고
자신이 무언가 되어가고 있다는 즐거움을 느낀다.
용기가 없어 타이거마스크를 쓰고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 나타나 고백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명장면이다.
최강자 유비호와의 짜고 치는 고스톱 경기에서
임대호는 각본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혈투를 벌인다.
경기에서 패배했지만 밝은 표정으로 출근하는
임대호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마스크를 썼을 때 열정과 자신감 넘치는 삶이
마스크를 벗은 삶까지 이어지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나도 마스크를 쓴 것처럼 다른 나로 살아보고 싶었다.
뭔가에 푹 빠져 미친놈 소리도 들어보고 싶었다.
(게임, 당구, 도박 등 남들이 한 번쯤 빠지는 것도
내겐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내 또래가 다 하던 스타크래프트도 안 해봤으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 부딪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현상유지를 택했다. (현상유지도 쉬운 게 아니었다.)
난 물살을 거스르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아니라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였다.
난 열정이 많은 사람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돈과 무관하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갈아 넣는
순수한 열정에는 항상 감동이 있다.
아내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 그렇다.
아내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대학로에 있는 극단에 들어가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인천과 서울을 오갔다.
뭐 하나에 미쳐본 적이 없던 나는 아내의 열정이
부럽기도 했고 박수를 보내고 존경심도 일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연극이 뭐길래...
아내의 열정은 임신 중에도 계속됐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대학원을 다니며
교육연극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얼마 전엔 실제 연극배우의 클래스에 참여하며
온오프라인으로 매일같이 대본 분석과 연습을 하더니
장장 세 시간가량의 긴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배우와 관객 모두 한마음이 되어 같이 맘 졸이며
열연하고 응원하는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이 고생을 하고도
또다시 연극 클래스를 시작하겠단다.
도대체 연극이 뭐길래...
어떤 매력이 있길래...
연극에 문외한인 내가 감히 추측해 보건대
과정에서 느끼는 감동과
무대에 설 때 느끼는 희열 때문 아닐까?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울고 웃으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보는 희열,
관객 모두가 무대에 선 나를 바라보는 눈빛,
공연을 마치고 박수받을 때 시원 섭섭 야리꾸리한 맛...
누구나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기립박수를 받아야 한다.
- R.J. 팔라시오, <Wonder> 中 -
내가 야구에 미쳐있는 이유가 그렇다.
유니폼을 갈아입을 때 나는 반칙왕의 임대호처럼
직장과 가정에서의 내 가면을 벗고
야구인 설타니의 가면을 쓴다.
팀원들과 땀 흘리고 성장하는 과정이 좋고
마운드라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두가 내가 던지기만을 숨죽여 바라보는 고요가 좋다.
이겨내고 해냈을 때의 기쁨과 감동은 말해 뭐 하랴.
이번에 시합할 때,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
여기서만큼은 내가 왕이다.
링 위에서만큼은 누가 뭐래도 왕이다.
- 임대호(송강호), <반칙왕> 中 -
12년 전 우연한 계기로 야구를 시작하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야구란 걸 알았고
잠자던 열정이 깨어났다.
한번 깨어난 열정은 야구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로 번져가고 있다.
이런저런 가면을 골라 쓰며
여러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내도 순수한 열정에 대한 존경이 있고
연극의 뽕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야구에 미쳐있는 나를 이해하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린 연극인 부부다.
아내는 무대에서 각본 있는 연극을,
나는 야구장에서 각본 없는 연극을 할 뿐.
레슨장에서 땀 흘리며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무대에 오른다.
행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이 순삭이다.
언제까지 이 행복과 설렘이 계속될진 모르겠지만
퀸의 머큐리 형님이 말씀하셨다.
Show must go on!
로마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다"고 했다.
맡은 역할, 신이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삶이라는 무대의 배우인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난 다른 의미에서 이 말에 동의한다.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지만
가면은 언제든 내가 바꿔 쓸 수 있고
여러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무심코 집어든 가면이 의외로 잘 맞아
희열을 느낄 수도, 벗어던질 수도 있다.
가면을 벗더라도 가면 속 내 모습은
조금씩 변화되고 있을 것이다.
이왕 시작된 연극,
이번엔 어떤 가면을 골라 써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