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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May 29.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1. 페레그리노's - 4




우리는 성모상과 순례자의 무덤, 한 무리의 양 떼와 옅은 안개를 지났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첫 번째 수돗가에 이를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이 두 모금 와인의 효과는 바닥났다. 하지만 처음에 시달렸던 악귀 같은 허기와 피로는 훨씬 덜했다.


수돗가에는 처음 만나는(아마도 오리손에서 출발했을) 페레그리노들과 헤르만이 있었다. 그는 수도 옆에 앉아 기다란 바게트를 씹는 중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자 염치고 민폐고 눈이 뒤집혔다. 그래서 신부님이 텅 빈 물통을 채우고 얼굴을 씻는 동안, 나는 헤르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헤르만. 헤르만.”


헤르만의 과묵한 눈이 대답 대신 나를 보았다.


“실례지만, 저 너무 배고파요.(이제와 다시 생각해도 엄청나게 부끄럽고 민폐인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헤르만은 물끄러미 보더니 흔쾌히 바게트의 절반을 뚝 떼어준다. 그저 한 조각 정도나 얻어먹을 요량이었던 나는 느닷없이 쥐어진 큼직한 빵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렇게 많이 안 줘도 되는데…….”


헤르만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는다.


“난 먹을 것이 많아요. 이미 배가 부르기도 하고.”

“헤르만……, 혹시 천사세요?”


한껏 감동해버린 나는 앉아있어 키가 낮아진 헤르만을 (나도 모르게) 포옹하고는, 재빨리 신부님께 다가가 빵을 나누어 내밀었다. 신부님은 불쑥 등장한 빵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헤르만이 줬어요.”

“아…….”


그제야 그것이 바게트임을 알아차린 신부님이 감사히 받아 들고 헤르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헤르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주 고개를 꾸벅이더니 먹던 음식을 정리해 배낭에 넣고 곧 먼저 자리를 떴다.  


피레네 정상을 건너려면 거대한 암벽을 하나 넘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은 필연적인 정체구간이다. 띄엄띄엄 걷던 페레그리노들이 암벽 초입에 옹기종기 모였다.


우린 서로의 손을 잡아가며 너른 벌판 중앙에 우뚝 선 바위의 가파른 표면을 밟고 올라섰다. 앞사람이 내 손을 잡아끌어 올리면 나는 뒷사람의 손을 끌어올렸다. 혼자 힘으로는 넘기 어려운 길이다.


고비를 넘긴 후부터는 한층 쉽다. 길이 편해져서가 아니다.  그저 이제는 정말 되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으니, 이 이상의 투덜거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받아들여서다.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한참이나 가서야, 비로소 우린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이르렀다. 나라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딱딱한 국경검문소가 아닌 하늘과 너른 들판이다. 여기서부터 스페인의 론세스바예스까진 죽 내리막이다. 이대로라면 5시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할 것이다.


“좀 쉬어가죠. 거의 다 왔으니까.”


우린 발치로 내려다보이는 스페인의 첫머리를 보며 풀밭에 앉았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청년들-아마도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은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채 드러누워 시끌벅적 떠든다. 얼마를 쉬었을까. 어느 순간,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에 익은 곡이네요. 제목이 뭐죠?”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

“아아.”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내리막은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산이었다. 죽자 사자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힘껏 긴장한 다리 근육이 제어를 잃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휘청댔다. 멈추려면 튕겨나가고, 속도를 낼라치면 발목이 헛도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어찌어찌 주변의 나무들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긴 했다.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산 저쪽과 이쪽의 날씨는 완전히 다르다. 생장 피드포르의 날씨가 가을이라면 이곳은 여름이다. 뜨거운 볕, 습한 바람, 진한 녹음……

내리막인데도 오르막에서만큼 땀이 흐른다. 그래도 좋다. 마을 어귀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저기가 론세스바예스인가요?”

“그럴 겁니다. 거의 다 왔군요.”


시계를 보니 4시가 훌쩍 넘어있다.

산을 완전히 내려오자, 차도가 드러난다. 흙을 밟는 것과 아스팔트를 밟는 건 천지차이다. 울퉁불퉁하고 자갈이 많아도 비포장도로를 걷는 편이 몇 배는 더 편하다. 왤까.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앞에 드디어 도착했을 때, 난 몹시 안도하고 너무 피곤해서 말을 잃었다. 벌린 입에선 단내가 나고, 발은 퉁퉁 부어서 단 한 걸음도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배낭 무게 때문에 어깨가 빠질 것 같다. 하지만 기쁘다. 정말 기뻐서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속속 도착한 사람들은 알베르게 문 앞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나도 차례를 기다리며 옛 성당을 개조한 알베르게의 견고하고 투박한 외관을 멀거니 구경했다.   


내 차례가 되자, 신부님과 함께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높고 안이 탁 틀린 알베르게 안에는 칸막이 없이 백 개 이상의 이층 침대가 주르륵 놓여있다. 병영숙소 같달까, 수용소 같달까. 이렇다 할 장식 하나 없는 그 광경은 단순함이 지나쳐 오히려 웅장하다.


협회 봉사자의 안내를 받아 신부님과 각각 침대를 배정받았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침대는 먼저 도착한 이수의 침대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와 신부님의 침대는 모두 1층으로 바로 이웃해 있다. 내 침대의 2층은 낯선 금발 여성이 이미 차지한 채 누워있다. 생각보다 침대 간격이 너무 가깝다며 어딘지 민망해하는 기색인 신부님을 두고 나는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위층보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나란히 늘어선 코인 세탁기와 책을 진열한 붙박이 선반, 홀에 둔 기다란 책상과 테이블, 입구 바로 옆엔 불필요한 물건을 기증하거나,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기증 물품을 두는 선반이 있다.


나는 빨래를 어찌할까 고민했다. 사실 세탁기가 있으면 세탁기를 쓸 생각이었지만, 달랑 한 벌에 3유로나 쓰다니 터무니없다. 결국 그냥 손빨래로 마음을 정하고 샤워실로 갔다.


샤워실 줄은 의외로 짧다.  하지만 금세 내 뒤로 원정 나선 개미 행렬처럼 사람들이 주르륵 늘어선다.

고양이 세수 수준의 샤워를 마치고 나와 세면대에서 옷을 빨았다. 비누칠은 시늉만 하고, 물에 적셔 대충 땀만 뺐다. 만사가 귀찮다. 어차피 내일 입고 나면 또 빨 옷이다.


속옷은 침대 난간에, 겉옷은 밖의 빨랫줄에 널었다. 이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신부님이 물었다.


“곧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 대수도원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을 텐데.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려면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더군요.”


본격적인(?) 성당 미사는 참여해본 적이 없어 조금 혹했다. 하지만 스페인어로 진행하는 미사일 테니, 알아듣기는 커녕, 그 소리를 벗 삼아 졸기 딱이다. 그렇다면 예배당에서 조느니, 침대에 누워 속 편히 자는 게 낫다.


“전 잘래요.”

“그래요, 그럼.”


그는 나도 갔으면 하는 기색이지만, 역시 강권하진 않으신다.


예배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나와 신부님, 그리고 다시 만난 이수는 저녁 식사 예약을 위해 수도원과 가까운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우리처럼 식사를 예약하러 온 사람들이 이미 꽤 많다.


예약을 마친 우리는 바로 옆의 간이 펍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3개뿐인 펍에서는 맥주와 간단한 스낵, 아이스크림을 판다. 테이블이 없는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맥주잔과 와인글라스를 손에 든 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플라멩코를 춘다.


우린 아이스크림과 과일주스, 맥주와 견과류가 담긴 스낵을 샀다. 그리곤 테이블 하나에 둘러앉아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으하, 살 것 같다.”


반이나 비운 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셋이 나란히 외쳤다.


“진짜 피레네를 넘긴 넘었네요. 난 거기서 딱 죽는 줄 알았는데. 배는 고프지, 먹을 건 없지, 물도 없지, 잠은 와서 미치겠지. 신부님이 준 와인이 아니었으면 아마 거기 있는 순례자 무덤이 하나 더 생겼을지도 몰라. 이수는 어땠어?”


이수는 여기서 우릴 다시 만난 게 생각보다 반가웠던 모양이다. 어제만 해도 무뚝뚝하던 그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 비슷한 것이 번진다.


“전 괜찮았어요, 그럭저럭.”

“과연 젊긴 젊군요. 어쨌든 무사히 첫 고비를 넘겼으니 축하를 합시다. 이수 군도 여기서 또 만나니까 정말 기쁘네요.”


우린 또 한 번 건배하고 남은 맥주를 모두 비웠다.




펍을 나온 신부님과 이수는 예배당으로 갔다. 한국에서 건축학도인 이수는 예배보다는 유서 깊은 수도원 건물이 궁금해서 간단다.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귀마개를 꽂고 한숨 잤다. 베개를 머리에 대자마자 의식이 끊긴(?) 꿈도 없는 기절이었다. 깼을 때는 1시간이 지나있었는데, 기분 상으로는 정말로, 진짜로 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 것 같았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여태 젖어있는 머리카락도 말리고 일행도 기다릴 겸,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밖엔 이제야 도착하는 페레그리노들도 있고,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도 있다. 알베르게 뒤편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선선한 바람을 따라 너울댄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포근한 기운이 가득한 풍경이다. 나는 수도원과 식당을 따로 잇는 갈래길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그동안 나처럼 일행을 기다리는 다른 페레그리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십여 분 정도를 기다리자, 성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 가운데 신부님과 이수의 모습이 보인다. 워낙 몇 안 되는 동양인 중 하나다 보니 금세 눈에 띈다. 두 사람에게는 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 식당으로 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내부는 초만원이다. 거의 피로연을 방불케 할 정도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빈 좌석에 앉았다. 식당은 페레그리노들로 가득하다. 테이블마다 모험가들 특유의 흥분과, 하루 여정의 순조로운 마무리를 자축하는 웃음으로 떠들썩하다. 평소라면 바로 맞은편 사람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이런 소란이 틀림없이 싫었을 텐데, 지금은 나까지 덩달이 들뜨고 즐겁다.


저녁은 페레그리노를 위한 코스 요리다. 테이블마다 와인과 물이 풍성하게 제공되고, 초리소를 넣어 만든 토마토 파스타가 접시 가득 푸짐하게 담겼다. 튀긴 생선과 감자를 곁들인 요리도 있다.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지정 좌석의 의미는 사라진다. 페레그리노들은 원래 자리를 떠나 테이블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서로 술을 권하고 즐겁게 마신다. 와인과 낯선 여행에 취한 그들의 뺨은 장밋빛이다. 어떤 이들은 손을 맞잡고서 빙글빙글 춤을 추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그 모든 풍경을 지켜보고 함께 녹아들다, 문득 깨닫는다.


이곳에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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