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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Aug 28.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3. 메세타의 나비 - 2



광활한 밀밭이 이어진다. 길 끝은 하늘에 있다. 하염없이 걷다 보면 내 발은 어느 순간 구름 위를 걷고 있을 것만 같다.


대지를 온통 뒤덮은 채 모랫빛으로 일렁이는 밀밭은 사막을 닮았다. 걸어도 걸어도 들판은 끝나지 않는다. 하늘은 완벽한 아치 형태로 휘어 있다. 적막한 바람이 몰아친다. 그렇게나 자주 보이던 순례자들도 지금은 띄엄띄엄 당최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일행과 걸을 때보다 덜 쉬고, 더 많이 걷는다. 걷는 동안 입을 뗄 일이 없어 혀뿌리에서 단내가 난다. 사람들과 헤어지면 한없이 자유 로울 줄 알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난 더욱 고립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돌로 된 벤치가 있다. 수도와 쓰레기통도 있다. 순례자를 위해 마련된 공간인 듯싶다.


나는 그곳에 앉아 빵을 꺼내 조금 먹었다. 별 맛없는 빵을 아무 생각 없이 씹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허리 벨트에 수레를 이어놓고 끄는 저 모습은 분명 스위스에서 온 노인이다. 자신의 집에서부터 반년 동안을 죽 걸었다던.


그는 날 향해 희미한 눈인사를 하더니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그리곤 기다란 바게트를 꺼내 잘라 그 안에 햄과 얇게 썬 치즈를 올려놓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감는다. 그러자 마치 거대한 밀림이 우거진 숲의 가장 깊은 곳, 수천 년을 살아온 고목들이 뿌리내린 땅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고요가 그곳에 있다.


잠시 후, 노인이 먼저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는 도착했을 때처럼 조용히 곁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그가 끄는 수레의 꽁무니를 쳐다보았다. 수레바퀴는 자갈과 모래와 부딪힐 때마다 낮은 소리로 알 수 없는 언어를 읊조린다. 마치 기도하듯.  


그가 먼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물집이 잡힌 발바닥의 통증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허허벌판 한복판에 홀로 남았다는 두려움이 나를 재우친다. 내 발자국 소리라도 들으려고 통증을 무릅쓰며 걷는 나는 처음으로 낯선 땅에 ‘아무도 없이 있음’을 실감한다.


2km는 이제 체감거리 20km로 나를 압박해온다. 도중에 물이 떨어져 극심한 탈수와 현기증이 날 괴롭힌다.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 그늘마저 잡아먹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한다. 쓰러질 것만 같다.


끝내 오솔길 길가에 주저앉은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당장 관두고 싶다. 내가 왜 편한 잠자리, 풍부한 물과 먹거리를 놔두고 이 미련한 짓을 하나 싶은 고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혼자 걷기 시작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러나 싶고, 정말 나는 이럴 줄 모르고 혼자 걷겠다고 작심했었나 싶고…….


하지만 버스는커녕,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이 괴괴한 길에서 중도하차해봐야 객사 밖에 답이 없다. 그러니 어서 이 고문 같은 여정이 끝나고, 쉴 수 있는 장소가 나올 때까지 다시 걸어야 한다.


그런 다짐을 하며, 아직도 한참 가야 할 아득한 길을 멀거니 내다본다.




몸서리쳐지는 하루 여정이 끝나고 프로미스타Fromista 초입의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신경은 피로로 인해 흔적 없이 용해돼버려서 뭘 느끼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고, 몸을 씻고, 맥주를 마시러 바로 나오는 순간까지 나는 영혼이 쑥 빠져나간 껍데기였다. 내가 아닌 무엇이 대신 몸을 차지하고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은 주문한 맥주를 모조리 비우고 난 뒤였다. 알싸하게 퍼지는 알코올 기운을 따라 졸졸졸 이성이 돌아온다.


플라스틱 의자에 늘어져 느릿느릿 돌아가는 천정의 팬을 본다. 이곳에도 순례자들이 드문드문 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일행과 함께 있지 않고, 대부분 나처럼 혼자 걸은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들도 나처럼 복잡한 마음일까? 아니면 보이는 그대로, 느긋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 걸까?


홀로 마시는 맥주는 비어있는 신부님과 이수의 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하루도 못 가 후회할 거면서, 나는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 이래 놓고 다시 일행을 만나 걷다 보면, 또 벗어나고 충동에 내내 시달릴 것이다.


나는 점점 내가 미궁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 안의 지도를 완성해나가는 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 나의 미궁은 어느 한 시절의 형태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계속 새로운 미로를 더해간다. 이제 좀 길을 알겠다 싶으면, 어느 순간 생겨난 또 다른 통로에 갇혀 헤매고 있다. 대체 이 짓은 언제까지 반복되는 걸까? 지긋한 나이가 될 때까지? 그럼 그 지긋한 나이는 몇 살일까?


아니면 설마, 죽을 때까지 내내 이러나?  


“재인?”


얼마나 놀랐는지, 쥐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여기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넋이 홀랑 빠져 올려다보자, 낯익은 얼굴이 날 내려다본다.


“……바오?”


그녀의 등 뒤에 당이 서있다. 두 사람의 머리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이겠지……?




저녁거리 장을 보러 나갔던 당은 와인 한 병을 사서 선물해 주었다. 지친 나를 위한 위로란다. 그 사이 바오는 물집이 생긴 내 발바닥을 보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줄줄 읊었다.


“물도 충분히 휴대하지 않고 그 뙤약볕을 걷다니 제정신이 아니네. 거기다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빈속에 술부터 마시면 어떡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바오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며, 당과 와인 한 병을 뚝딱 비웠다. 아무리 봐도 당은 바오의 잔소리를 피하려고 본인이 마시고 싶은 와인을 내 핑계로 사온 것 같다.

바늘과 실로 내 발바닥의 물집을 상처 없이 터뜨려 준 바오는 전용 연고를 주며 물었다.  


“일행과는 왜 헤어졌어?”

“일행들 속도가 좀 벅차서. 내내 떠들며 가는 것도 피곤했고.”

“……하기야 발이 이러니, 빨리, 많이 걷는 건 무리였겠다.”


나는 두 사람과 저녁을 먹고 8시가 넘어 침대에 누웠다.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고도 단순하다. 바오와 당을 만나 막막했던 가슴이 잠시 해소된 것만으로 내일 또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으니 말이다.




메세타의 풍경에 관해서는 딱히 기술할 것이 없다. 매일 보는 풍경이 거의 똑같으니까. 그래서 꼭 뫼비우스 띠 위를 달리는 것 같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수요일처럼.


왜 굳이 수요일이냐고 묻는다면, 이곳이 수요일을 닮았으니까,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 나에게 수요일은 한 주의 시작과 끝을 잇는 통로 정중앙 같은 요일이다.


나에게 메세타가 꼭 그렇다. 생장과 콤포스텔라가 이어지는 길의 정중앙. 이 정중앙의 분기점을 넘기만 하면, 나머지는 뭐 어떻게든 잘 될 것만 같은 예감.


메세타를 홀로 걷는 동안, 나의 자아는 최소 단위로 돌아간다. 누구와도 말을 나눌 필요 없고, 누군가를 신경 쓸 일도 없다. 그저, 자기, 걷기,  쉬기, 먹기, 씻기의 가장 단순한 일만 반복하면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스물몇 해를 살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붙여온 군더더기들이 부스스 떨어져 나감을 느낀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메세타를 버텨내기 위해 나는 생각하기를 택했다. 상상부터 망상에 이르기까지 두서없는 상념의 파편들은 제련 중인 철의 불꽃처럼  내 안에서 번쩍번쩍 튀어 오른다.


나는 그 불꽃들을 삼키며, 내가 나와 나누는 대화 속으로 침잠한다. 내 안의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려서는.  


둘이 나누는 생각들은 영원할 것만 같다가도 별안간 해체되길 반복한다. 우리는 매번 각자의 모습을 바꾸었고, 매 순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결국 어쩌면 모두 같은 이야기이다.


생성과 붕괴를 거듭하며, 나는 어딘지 조금씩 이전과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 변화는 너무도 미세해서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새카만 어둠에도 잡아먹히지 않는 반딧불처럼 작지만, 여기저기서 또렷한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빛이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우리는, 나는 알고 있다. 출구가 거기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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