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감상평 14
*<잠> 영화에 대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공포에 대하여
전에 다룬 기억이 있는데 난 무서운 걸 잘 본다. 잘 보는 수준이 아니라 공포심을 잘 못 느낀다. 물론 나도 어두컴컴한 밤에 혼자 세수를 할 때-보통 내가 스스로 취약하다고 여기는 시점에-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는 하지만 금세 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
공포 영화 같은 데선 자비가 없는 편이다. 흔히들 싫어하는 점프스케어(갑툭튀)에서는 나도 깜짝깜짝 놀라긴 하지만, 영화를 다 본 뒤에 해당 장면을 프레임 단위로 끊어 돌려보면서 '어떻게 찍었을까', '어떤 분장일까', 'CG는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보기도 한다. (T 아님)
나는 더 큰 공포를 찾아 헤매는 공포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이게 뭐가 무섭냐'고 되물어보는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다만 실제로 돌아다니는 귀신을 목격한 게 아닌 이상, 누가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관심이 생겨버린 것뿐이다.
공포영화는 100% 누군가 만든 영화잖아.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나 큰 공포를 심어줄 수 있는가, 얼마나 긴장감 있는 서스펜스 요소를 만들어내는가가 내게 있어서는 재미 요소였다.
가장 큰 공포는 일상에서
공포 영화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예전에 넷플릭스에서 <주>를 봤던 기억을 잠시 되살려보겠다. 이 영화는 '공포, 미스터리 탐사 동아리'의 일원인 주인공들이 시골 오지의 종교행사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폐쇄적인 문화로 자기들끼리 짝짜꿍 행사를 즐기며 놀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인공 일행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굳이 들어가고 만다. 그 뒤로는... 이하 생략.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공포는 보통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 말라는 건 꼭 하고, 가지 말라는 곳에는 꼭 가고, 해야 될 건 꼭 하지 않는. 아류 공포영화 성립의 3종세트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영화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만 영화가 진행된다면 극을 잘못 만든 거다.
영화 속 인물들이 착한 어린이들처럼 횡단보도 건널 때 손을 들고 건너고, 귀신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것도 재미없긴 하겠다만. 인물의 행동이 어떤 심리에서 기반한 건지 관객이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각본의 올바른 역할이겠다.
각설하고, 폐허에 찾아가서 강령술을 한다거나, 귀신 들린 집이나 사람에게서 제령술을 하는 등의 영화는 전적으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곤지암>에서는 주인공들이 공포 컨텐츠 방송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로 등장한다.(사실 기억이 안 난다.) 여하튼,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해서 공포 요소가 시작되려면 '굳이 꼭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배경이 필요하다.
그런데 <잠>에서는 그런 부분이 필요가 없다. <잠>에서의 공포는 그냥 일상 속에 스르륵 스며든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다가온다.
줄타기
공포 영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줄타기'라고 생각한다. 너무 현실 같지 않으면 유치하고, 너무 현실 같으면 불쾌하다. 어느 부분에서는 영화적 과장을, 어느 부분에서는 실제적 환기를 반복하며 얼마나 줄타기를 잘하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공포영화가 장르적 재미를 위해 점프 스케어를 남발한다든지, '아무튼 무섭잖아'라고 주입하지 않는 태도가 좋다.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중에 <미드 소마>가 떠오르는데, 내가 원하는 줄타기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불쾌감의 한계치를 붙잡고 줄타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 궁극적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게 좋았다.
<잠>은 이 부분에서 아주 쫀쫀하게 줄타기를 한 케이스다. 과학과 비과학, 오컬트와 스릴러의 경계에서 누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든 그쪽에 맞춘 해석이 가능한 독특한 영화다.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경험과 숫자들이 기묘하게 얽히며 연출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영화 도입부의 복선 뿌려두기 단계에서 아랫집이 시끄럽다며 항의하는 장면도, 쓸데없이 로맨틱한 둘의 모습도 적당히 긴장감 있게 전개되는 줄타기가 돋보인다.
그러나 <잠>에서 가장 기묘한 줄타기는, 가장 간편한 해결책인 '현수(이선균 분)가 회복될 때까지 잠만 따로 잔다'를 배제한 데서 비롯된다. <잠>은 현수를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가는 수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현수가 밖에서 잔다는 선택지를 어떻게든 외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게 없다'는 가훈이다. 현수가 밖으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할 때마다 수진(정유미 분)은 이 가훈을 대는데, 이것이 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깊은 의미인지 관객이 명확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수진이 이 문구에 왜 이렇게 목을 매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마따나 영화가 진행이 되질 않잖아. 현수가 밖으로 나가서 자는 게 왜 안되는지 관객이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시켜 줬다면 더 좋았을 테다. 그러나 이해 못 할 수준으로 선을 넘어가는 건 아니었다. 불친절한 영화들은 많고, 그건 익숙하니까. 이건 내가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둘이 같이 있음으로써 현수와 수진을 대비시키고 둘이 가진 마찬가지의 절박한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영화는 전개된다.
영화를 3장으로 나누어, 루즈해지는 부분 없이 둘의 관계적 진전을 쉽고 빠르게 보여주는 것도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류의 영화는 관객이 생각이 많아지면 안 된다. '그냥 ~하면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이미 들었다면 유감이다.) 이는 당장 다가오는 장면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시선을 잡아끈다.
믿고 싶은 걸 보여주다.
<잠>이 유니크하다는 평가를 받은 데에는 이 부분의 줄타기 때문이겠다. 영화가 스크린에 담아내는 상징적 연출이 돋보인다. 현수를 연기파 배우로 설정한 것, 그러면서도 소위 잘 나가는 역할이 아닌 단역을 전전하는 것, 대본을 너덜너덜하게 보는 현수가 실수할 리 없는 '누가 들어왔어'라는 어중간한 대사까지.
무당이 등장하는 장면도 낯설다. 사실 무당에 대한 선입견이 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지만... 고급 외제차를 타고 나타나서 고야드 가방을 들고 다닌다면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을 것 같다. (부업이 래퍼인가?)
그런데 포인트는 반대로 정신의학과도 믿음직하지 않다는 거다. 환자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들을 골라서 하고 남일 대하듯이 기계적이다. 무당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수진이 돌아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었을 테다. 과학과 비과학의 모호한 경계를 줄타기하는 설정이다.
무당한테 굿도 받고 정신의학과 치료도 받고... 돈 살살 녹겠다...
영화는 끝까지 이 부분을 줄타기한다. 종래에는 하필 왜 이게 맞아떨어지냐는 심정이었다. (수진이 어떻게 집까지 도착했는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것 같으면서도 PPT 준비를 하는 참된 직장인의 자세를 보며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아닌가를 가늠할 틈도 없이, 영화는 끊임없이 몰아친다.
앞서 반려견 후추를 보여주지 않았다가, 그와 닮은 앤드류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릴로 머리를 뚫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관객이 뭔가를 다급하게 생각하게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게끔 유도하는 연출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영혼이 실제로 빠져나갔건, 현수가 필사의 연기로 수진을 속였건.
수진은 영화 내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편안하고 평온한 잠을 만끽하게 된다. 코까지 골면서.
무엇이 진짜인가,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잠>은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