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 사직서

마음 속

by 거의모든것의리뷰

가슴 한켠의 사직서


회사 복도에서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 하지만 그의 가방 안에는 보이지 않는 사직서가 들어있다. 아직 제출하지 않았을 뿐,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번 쓰고 지웠다.

"모든 직장인은 사직서를 안고 산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쓰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언제든 쓸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주는 위로다.

힘든 월요일 아침, "오늘 사표 내고 싶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동료와 나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직서는 다시 마음 깊은 곳에 접어둔다.


어느날 들려오는 소문이 있다.

같이 있던 팀 동료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팀 회의에서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여러분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김대리가... 이번 달 말로 퇴사하기로 했습니다."

순간 회의실에 묘한 정적이 흐른다. 사람들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부러움.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이다. '저 사람은 해냈구나.' 우리 모두가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그 순간을, 저 사람은 현실로 만들었다. 사표를 쓰고, 제출하고, 받아들여지고, 이제 여기를 떠난다. 더 나은 곳을 위해 적어도 여기보다 더 나아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경쾌할 것이다.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하지만 대놓고 묻지는 못한다. 그저 "수고 많으셨어요", "새로운 곳에서도 잘하실 거예요"라는 정형화된 인사만 건넨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다. 모니터를 켜지만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은 온통 김대리 생각뿐이다.

'나도 저렇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엑셀을 켠다.


전세 대출 이자: 110만원

생활비 대출 상환: 40만원

핸드폰: 5만원

관리비: 15만원

보험: 8만원

구독 서비스들: 3만원

교통비: 10만원

합계: 191만원.


손실 급여가 세후 300만원. 고정비 빼면 110만원 남짓, 여기서 식비, 경조사비, 갑자기 생기는 지출들 빼면... 한 달에 모을 수 있는 돈은 기껏해야 20만원.


퇴사하면?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보통 2~3개월이라고 하던데. 퇴직금이 있긴 하지만 그걸로 6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3개월도 버틸 수 있을까?


그것도 정말 아무 일 없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갔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치과에 가야 한다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친구 결혼식이 있다면?

손가락이 떨린다. 엑셀 시트를 닫는다.


시트는 닫았지만 머릿속은 끝나지 않은 채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시나리오 1: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고 간다.


좋은 회사에 합격한다. 연봉도 조금 올랐다. 첫 출근 날, 새 사무실, 새 동료들. 그런데... 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이제 편해졌다. 누가 어떤 성격인지 안다. 누구한테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안다. 업무 프로세스도 눈 감고 할 수 있다. 점심은 언제 먹고, 커피는 어디서 사고, 화장실은 몇 층이 한산하고.

3년 동안 쌓은 이 루틴들. 새 회사에서는 처음부터 다시다. 신입처럼 어색하게 인사하고, 누가 누군지 얼굴과 이름 외우고, 업무 배우고, 실수하고, 또 배우고.


'거기 가서도 잘할 수 있을까?' '혹시 여기보다 더 힘들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면?'


시나리오 2: 휴식을 취하다가 이직을 한다.


퇴사 후 한 달 정도는 놀자. 밀린 잠 자고, 보고 싶었던 영화 보고, 여행도 가고.

처음 일주일은 천국이다. 알람 끄고 자고, 평일 낮에 카페 가고. "아, 이게 삶이지" 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2달째부터 불안이 찾아올 것 같다. 이직을 준비하고도 2~3개월은 걸린다고 했지만 점점 더 불안이 찾아올 것 같다.


결국 걱정만 한가득 남긴채 시나리오 종료.


나가고 싶다. 진심으로. 월요일마다 출근하기 싫고, 보고서 쓰기 싫고, 회의 듣기 싫다.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5년 후 10년 후에도 이러고 있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하지만 전세 대출 이자가 있다. 핸드폰 할부금이 남았다.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싶다. 친구들 만날 때 주눅들기 싫다. 그리고 솔직히, 무섭다. 이 회사를 떠나는 것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그 다음이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혹시 실패하면 어쩌지. 혹시 더 힘들면 어쩌지. 혹시 후회하면 어쩌지.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매번 같은 대답. 매번 같은 결론.


오늘도 출근한다. 가방 안에는 보이지 않는 사직서가 들어 있다. 언제 꺼낼지는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꺼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어."

이 한 문장이 우리를 버티게 한다. 역설적으로,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남아있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가능성조차 희미해진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 또 다시 생각할 테니까.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사직서를 품고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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