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 상사

끝없는 굴레

by 거의모든것의리뷰

신입사원 시절, 세상은 단순했다. 나 위에 대리님이 있고, 그 위에 과장님, 부장님, 그리고 임원. 이 피라미드가 전부인 줄 알았다. 저 꼭대기까지만 올라가면 되는 줄 알았다. 점점 더 올라갈 수록 눈치볼 사람이 없어지는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5년이 지났다. 이제 나도 대리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슬은 끝이 없다는 것을. 내가 올라가도 위에는 여전히 누군가 있고, 내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정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건 사다리가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체인이었다.


어느날 아침, 후배가 내 자리 옆으로 온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보고할 게 있다는 표정이다. 승인받을 게 있다는 눈빛이다. 물어볼 게 있다는 몸짓이다. 김 사원은 나의 눈치를 본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말을 걸어도 될까, 이 보고서는 괜찮을까. 김 사원에게 나는 상사다.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고, 그가 설득해야 할 대상이고, 그가 평가받는 기준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향한다. 과장님이 먼저 자리에 앉아계신다. "과장님, 저번 프로젝트 건인데요..." 이번엔 내가 고개를 숙인다. 내가 보고할 게 있다. 내가 승인받을 게 있다. 내가 물어볼 게 있다. 과장님의 눈치를 본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말을 걸어도 될까, 이 안건은 괜찮을까. 아침에 김 사원이 나를 보던 그 눈빛으로, 이제 내가 과장님을 본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상사지만, 나에게도 상사가 있다. 저녁이 되면 과장님이 부장님께 보고한다. 부장님은 임원께 보고한다. 임원은 사장님께 보고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보고의 사슬. 끝없이 이어지는 승인의 사슬. 끝없이 이어지는 눈치의 사슬. 나는 이 사슬의 한 고리다. 위를 당기면 아래도 따라오고, 아래가 흔들리면 위도 흔들린다. 끊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박 부장은 올해로 입사 20년차다. 신입 때 꿈꿨던 그 자리, 부장까지 올라왔다. 팀을 이끌고, 의사결정을 하고, 연봉도 꽤 받는다. 월요일 아침 회의실, "부장님, 이번 분기 실적이..." 팀원들이 보고한다. 박 부장은 듣는다. 지시한다. 승인한다. 거부한다. 이 순간만큼은 왕이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면 책상 위 전화기가 울린다. "박 부장, 잠깐 올라와 봐." 임원실이다. 아까 팀원들 앞에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다. 등이 굽는다. 목소리가 작아진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최 상무는 30년차다. 임원이다. 이사회에 참석한다. 중요한 결정에 참여한다. 회사의 방향을 논의한다. 하지만 회의실 상석에는 여전히 사장이 앉아 있다. "최 상무 생각은 어때?" 조심스럽게 말한다. 30년을 일해도 여전히 눈치를 본다. 이 의견을 받아들일까? 반박당하면 어쩌지? 다른 임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임원에게도 상사가 있다. 그럼 사장은? 사장이야말로 정점 아닌가? 아니다. 회장이 있다. 사장에게도 상사가 있다. 심지어 회장은 은퇴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대부분 창업주거나 그 자녀다. 회사가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회사다. 그래서 회장은 영원한 상사가 된다. 입사 5년차에도 회장이 있고, 입사 20년차에도 회장이 있고, 임원이 되어도 회장이 있다. 끝없는 사다리. 아니, 사다리라는 말도 맞지 않다. 사다리는 끝이 있다. 이건 사슬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체인. 한 고리를 벗어나면 다음 고리가 나타나고, 그 고리를 벗어나면 또 다음 고리가 나타난다.


2024년 5월의 어느 저녁, 치킨집.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되었다. 이재용 회장, 정의선 회장, 젠슨 황 CEO. 테이블에 치킨과 맥주. 이들은 각자 삼성, 현대차, 엔비디아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재계 1, 2위. 그리고 전 세계 AI 시대의 핵심을 쥔 사람.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 과연 저 사람들이 마냥 즐겁게 치킨을 먹고 있을까?


이재용도 젠슨 황의 눈치를 본다. GPU가 필요하다. 엔비디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반도체 사업의 미래가 걸려 있다. 자리가 아무리 높아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필요한 게 있으면 고개를 숙인다. 정의선도 마찬가지다. 전기차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도체가 필요하다. 자율주행 기술이 필요하다. 둘 다 젠슨 황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럼 젠슨 황은? 세계 최고 기업의 CEO. 시가총액 수조 달러. 그도 자유로운가? 아니다. 주주들, 시장,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엔비디아는 반도체를 팔기위해 25%의 수수료를 정부에 지불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생각한다. 이 사슬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퇴사?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회사를 떠난다. 상사도 사라진다. 하지만 다음 회사에 가도 상사는 있다. 아니, 새로운 상사는 더 낯설다. 관계를 새로 쌓아야 한다. 신뢰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창업? 내 회사를 만든다. 내가 대표가 된다. 상사가 없다. 하지만 고객이 상사가 된다. 투자자가 상사가 된다. 은행이 상사가 된다. 시장이 상사가 된다. 오히려 더 많은 상사를 모시게 될지도. 프리랜서? 자유롭게 일한다. 원하는 프로젝트만 한다. 상사 없이 산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상사다. 안정적이지 않다. 월급이 일정하지 않다. 불안하다.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사 없는 삶은 없다. 완전한 자유는 없다. 누군가와 일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사원에게도 상사가 있고, 부장에게도 상사가 있고, 회장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사가 있다. 이건 회사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사회의 구조 자체가 그렇다. 계층이 있고, 위계가 있고, 평가가 있다. 학교에도 선생님이 있고, 군대에도 상관이 있고, 가정에도 어른이 있다. 완전히 혼자가 아닌 이상,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는 항상 위아래가 생긴다.


월요일 아침이 온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김 사원이 인사한다. "응, 안녕하세요." 대답한다. 잠시 후, 과장님께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어, 왔어?" 과장님도 부장님께 인사할 것이다. 부장님도 임원님께 인사할 것이다. 임원님도 사장님께 인사할 것이다. 끝없는 사슬. 하지만 오늘도 출근한다. 내 자리에 앉는다. 컴퓨터를 켠다. 상사에게 보고할 자료를 준비한다. 위를 보면 끝이 없고, 아래를 보면 계속 이어진다. 이게 직장이고, 이게 사회고, 이게 인생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도 괜찮다. 끝없는 사슬이지만, 이 사슬이 나를 떠받치기도 한다. 위가 있어서 배우고, 아래가 있어서 가르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비록 자유롭지는 않지만, 완전히 외롭지도 않다.


관련 항목: 입사, 직급, 승진, 눈치, 보고, 평가, 권력, 위계, 자유, 독립, 창업, 퇴사, 사슬, 구조, 관계, 성장, 존중,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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