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 야근

지옥의 굴레

by 거의모든것의리뷰

해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다

다크써클도 해를 따라간다

끝없는 피곤속으로


하나 둘 떠나가는 사람들의 온기

야경을 수놓는 불켜진 사무실


차가운 정적 속

타닥 타닥 유일한 소리는

모닥불이었으면 좋았을 키보드


차라리 해가 길었다면 착각이라도 했을텐데

겨울의 짧은 해가 야속할 따름이다


오후 6시, 퇴근 시간이다. 아니, 퇴근 시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 없다. 모니터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보고서가 떠 있고, 메일함에는 회신하지 못한 메일들이 쌓여 있고, 캘린더에는 내일 오전 회의가 빨갛게 표시되어 있다. 집에 가고 싶다. 진심으로, 간절히, 지금 당장 가방을 들고 나가고 싶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켜고 싶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싶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 없다.


창밖을 본다. 해가 지고 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었었는데 어느 새 어두워졌다. 저 바깥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미 한번의 퇴근 시간이 지나가고 야근을 하는 자들만이 간간히 퇴근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퇴근한 사람들은 저녁 약속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헬스장에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집에 가서 쉬는 사람도 있겠지. 부럽다. 진심으로 부럽다. 퇴근 시간이 되면 퇴근할 수 있는 사람들. 일이 끝나지 않아도 일단 집에 갈 수 있는 사람들. 내일 다시 하면 되는 사람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왜 아직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 누가 강제로 앉혀놓은 것도 아닌데.


사무실이 텅 비어간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나간다. 어느새 조용해진 사무실, 키보드 소리,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만 남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거린다. 형광등 불빛만 차갑게 내려앉는다. 쓸쓸하다. 이상하게 쓸쓸하다. 낮에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공간이, 밤이 되면 황량해진다. 마치 버려진 공간 같다. 아니, 나는 버려진 사람 같다. 모두가 떠난 이 공간에 혼자 남겨진 사람.


7시가 넘었다. 배가 고프다. 저녁을 먹을까? 그냥 참을까? 참고 일 끝내고 집 가서 먹을까? 하지만 집에 언제 가지? 8시? 9시? 10시?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파일을 열고 닫고, 자료를 찾고, 문장을 고치고, 표를 만들고, 그래프를 그린다. 끝이 없다.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게 생긴다. 마치 시지프스의 바위 같다. 끝없이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도착하지 못한다. 아니, 정상이 어딘지도 모른다.


회사가 밉다. 진심으로 밉다.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걸까?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걸까? 왜 회의는 그렇게 많고, 왜 보고 자료는 그렇게 많고, 왜 급한 일은 항상 저녁 때 떨어지는 걸까? 시스템이 잘못됐다. 구조가 잘못됐다. 사람을 너무 적게 뽑았다. 일을 너무 많이 만든다. 불필요한 절차가 너무 많다. 누가 이 회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설계했을까? 화가 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팀장님? 부장님? 임원? 사장? 회장? 아니면 이 시스템 자체? 아니면 이 회사를 선택한 나 자신?


8시가 넘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야근 중이다. 다들 나처럼 집에 가고 싶을 것이다. 다들 나처럼 피곤할 것이다. 다들 나처럼 이 상황이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다들 남아있다.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된다. 내가 혼자 고생하는 게 아니구나. 함께 고생하고 있었다.


모순적이다. 회사가 밉다. 이 상황이 싫다. 야근을 만드는 시스템이 분하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야근하는 동료들이 뭔지 모르게 고맙다. 혼자였다면 더 외로웠을 이 차가운 적막에서 함께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조금 더 견딜 만하다. 어쩌면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로 위로하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우리는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다.


출근을 할 때만 하더라도 6시엔 집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8시반, 어느 정도 마무리한 자료를 저장하고 집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낮처럼 붐비지 않는다. 자리에 앉는다.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 너무 피곤하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다. 내일 또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 피곤하다. 또 야근할지 모른다는 것이 피곤하다. 이게 반복된다는 것이 피곤하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항상 남아있는 팀장님은 도대체 언제 집에 가는거지. 내가 나올 때 아직 남아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는걸까? 나보다 더하면 더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괜찮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 스스로에 대한 가스라이팅임을 깨닫고 몸서리친다. 5시가 퇴근인데 8시에 퇴근해놓고 다른 사람들은 더 고생하니까 괜찮다고 자위하다니! 이 회사는 역시 안된다. 더 빠른 퇴근을 보장하라!


집에 도착한다. 문을 연다. 불을 켠다. 소파에 앉는다. TV를 켠다. 하지만 볼 기력도 없다. 그냥 앉아 있다. 멍하니 천장을 본다. 오늘도 버텼다. 내일도 버텨야 한다. 혼자가 아니니까. 함께 버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게 위로일까, 함정일까? 모르겠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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