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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Nov 04. 2021

ADHD인 줄 알았는데 우울증이었다

마음클리닉 1

‘와. 미쳐버리겠다.’

 

활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일찍이 영포자를 자처했던 나는 <문학교육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두고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게 한글이 아니라 영어 맞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책 한 권이 정말 읽히지가 않았다. 편입 후 1학기 첫 번째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 늦은 밤 기숙사 휴게실에서 책을 보다가 스스로가 한심해져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나 진짜 멍청한가 봐. 공부를 하다가 울어본 건 그날이 두 번째였다. (고3 때 한국 근현대사 시험 범위가 많아서 울었던 전적이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오랜만에 공부를 시작해서 그런 건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집중도 안 되는 것 같고. 일단 내 상태를 살피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도 삼천포로 빠져서 잡생각을 하는 건 기본이고, 10분도 견디지 못해 핸드폰으로 향하는 나쁜 손. 집중력이 0에 수렴할 정도였다. 그것뿐인가. 길을 걷다, 혹은 샤워를 하다 갑자기 흑역사였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혼자 소리를 지르고 혼잣말도 했다.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잠을 못 자서일까?

 

매우 높은 확률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입을 하고 나서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친구들이 하나도 없는 타지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나는 재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입생이었고 낄끼빠빠를 중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행여나 애들이 불편해할까, 눈치를 보는 건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거리를 두는 편이기도 했다. 나름 낯을 가리는 성격이기도 해서 먼저 다가가는 것도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로워졌다. 매일 핸드폰을 붙들고 친구들에게 너희 얼굴 보고 싶다고, 찡찡거리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학교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했다. 그럼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들이 늘어가면서 나의 고민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선 나는 교육학을 배우는 사람이다. 학교를 다니며 전공 필수인 국어과 부진아 교육 강의도 들었다.

 

‘혹시 나 ADHD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 증상과 ADHD의 증상이 흡사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하나.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을 것이라는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아픈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병원 검색을 하다 정신과 진료가 추후 보험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다. 이 때문에 장장 6개월을 고민한 끝에야 결심이 섰다. 내가 멀쩡히 살아야 보험 문제도 걱정할 수 있다. 내가 정신적으로 아프고 문제가 있다면 고쳐야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된 지 1년이 되던 때였다.

 

4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본가로 내려와서 미리 전화로 예약을 마치고 소아청소년 전문 마음클리닉을 찾아갔다. ADHD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기다림 끝에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선생님, 제가 집중도 잘 못하고 ADHD가 아닐까 싶어서 왔는데요.’

‘증상이 어떤데요?’

 

일을 그만두고 편입해서 시험을 준비 중인데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수면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왜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냐는 질문에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실 밖에서 우선 설문지를 작성하고 오라고 하셨다.

 

내가 받아 든 것은 뜻밖에도 우울/불안에 관한 자가진단지였다. 이게 지금 나한테 왜 필요하지? 나는 우울해서 온 게 아닌데. 의아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설문지 문항을 체크하면서 의사 선생님이 명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가진단을 하면서 내 마음이 생각보다 많이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가진단 설문지를 토대로 다시 상담을 이어갔다. 자가진단 결과 우울/불안의 정도가 높다, 우울증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ADHD가 아니냐고 질문을 했다. 보통 ADHD는 성인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 많아서 뇌에 과부하가 온 거라고 보는 게 맞다고 이야기해주셨다.

 

뇌에 과부하가 온 이유야 많았다. 임용고시, 합격과 불합격에 대한 걱정과 불안, 사람에 대한 배신감, 말을 하다 보니 가정사까지 털어놓게 되었다.

 

‘엄마, 아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후 의사 선생님과 20분가량 이야기를 더 나눴던 것 같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느꼈으니까. 수면에 도움이 되는 약을 처방받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면 검사지를 챙겨줄 건데, 문장검사가 있어요. 문장을 보면 절대 고민하지 말고 바로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써오세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한 번 더 들었다. 하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적는 답변지 같은 것이었고, 하나는 문장완성검사지였다. 전자의 검사지는 천천히 써도 되지만, 문장완성검사의 경우 생각나는 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살짝 보니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앞 문장을 보고 이어서 문장을 완성하는 쉬운 검사였다.

 

집으로 돌아와 당부받았던 대로 문장의 빈칸을 채웠다.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정말 생각나는 대로 막 썼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렇게나 휘갈겨 완성한 검사지를 훑어보았다. 검사지에는 나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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