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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꽃향기 Oct 13. 2024

함께하는 힘은 위대하다.

좌충우돌 초등교실 이야기




10 - 꼬마 연주자들




 4월부터 시작된 바이올린 수업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아이들은 6개월 동안 총 16차시의 바이올린 수업에 참여했다.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스무 명은 바이올린을 처음 접했다. 대부분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30대 초반,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어 음악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로망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내 단짝은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고 그 연주 실력은 하늘을 찌를 듯 뛰어났다. 단짝은 제법 어려운 곡도 무리 없이 연주했는데 , 그래서인지 학교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바이올린은 소위 있는 집 자식들만 배울 수 있는 고급 악기였다. 그래서 나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행사에서도 단짝의 연주는 이어졌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아름답게 연주를 해내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30대가 되어서야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만져 본 나는 꿈 많은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너 이렇게 까다로운 아이였니?'



 왼쪽 어깨 위에 바이올린을 올려야 하고, 턱받침 위에 왼쪽 턱을 살며시 대야 한다. 왼손 손바닥으로 지판 뒤편을 감싸야 하고, 네 개의 손가락으로 지판을 눌러야 한다. 게다가 오른손으로는 활을 들어야 하고, 현의 위치에 따라 아래쪽 팔의 각도를 조절하면서 팔 전체를 한꺼번에 움직여 주어야 한다. -6개월 정도 배우고 나가떨어져서 이 또한 짧은 지식임을 밝힙니다- 비록 시간 핑계 대며, 컨디션 핑계 대며 중간에 그만두었지만 느낀 바는 컸다. 세상에 쉬운 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고, 어렸을 때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로망을 훌훌 털어냈다.



 과연 3학년이 할 수 있을까?

 16차시의 시간이 도움이 될까?

 



  2022년, 4학년 담임이었던 해에도 바이올린 교육은 진행됐었다. 올해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전공자가 일주일에 한 시간씩 아이들을 가르쳤다. 코로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였지만 학교에서의 방역 수칙은 여전히 철저했었다. 바이올린 시간, 나의 시선은 그저 거리 두기를 잘하는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해에는 개인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는 아이들이 꽤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딱히 신경 쓸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3학년이? 바이올린을 배운 친구가 한 명뿐인데? 큰일 났다 싶었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어쩌나? 게다가 스물한 명이 한꺼번에 받는 수업인데?  걱정부터 앞섰다.


  

 첫 시간,  바이올린이란 악기의 명칭을 배웠고, 어깨 받침을 끼우고 빼는 연습을 여러 번 했다. 한 손으로는 활을,  다른 한 손으로는 바이올린 지판 뒤쪽을 잡았다. 아이들은 예상대로 어깨와 턱이 동시에 일을 해야 하는 고난도의 동작을 연습하며 힘들다고 아우성을 쳤고, 못 하겠다고 앉아 버리기도 했다. 바이올린 선생님과 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이것저것 잡아주며 두어 시간 진땀을 뺐다. 그리고 이어진 "미" 줄 연습, 지판에는 이미 가느다란 색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아이들은 색 테이프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리고 활 긋는 연습이 무한 반복 됐다. 처음에는 모기 소리도 들렸고, 날카롭게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도 들렸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예쁜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내 바이올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악기를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아이들은 힘들어하는 친구를 응원했다. 수업이 끝날 때 즈음엔 항상 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실수를 하더라도 박수를 보내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친구들에게 '같이 하자!'며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바이올린을 대하는 아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워졌고,  그 연주 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맞춰 갔다.  



 2024년 10월,  16차시 마지막 시간에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비행기, 작은 별, 나비야, 젓가락, 자전거까지 아이들은 무리 없이 연주해 냈다. 물론 여전히 모기 소리도 들렸고  쇳소리로 귀가 아프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의 음정과 박자에 맞추어 끝까지 활을 움직였다. 16차시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2021년,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첫해는 코로나 유행이 너무 심한 시기여서 학교에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2022년, 우리 모두는 코로나 유행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제공되지 못했던 다방면의 기회는 아이들뿐 아니라 훗날 사회에도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인식이 짙어졌다. 결국 바이올린 수업을 비롯하여  문예체 교육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역 수칙 매뉴얼이 변함없이 철저했기에 아이들의 변화 과정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2024년,  -나는 2023년 학교를 떠나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다시 예전처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바이올린 수업 시간, 내가 할 일은 임장 지도였다.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유난히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 옆에서 조력자가 되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서 한걸음 물러났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가 아닌 조력자의  입장으로 그 변화를 지켜봤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이고 또 의미 있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만났고, 네 현 중 두 현을 운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다섯 곡을 연주해 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보여준 변화는 어디 내놔도 분명했고 확실했다. 마음의 성장은 또 얼마나 이뤄졌을까?  힘들어하는 친구를 다독였고, 격려했다.  서로의 연주를 들으며 박자와 음정을 맞춰 갔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배려와 조화’ 다섯 글자를 깊이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본 나 역시  가슴속에 희미하게 쓰여 있던 두 문장을 아주 또렷하게 덧칠할 수 있었다.




 "함께하는 힘은 위대하다"



 "아이들의 성장은 무궁무진하다"





 이 두 문장을 진하게 덧칠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상황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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