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꽃향기 Nov 14. 2024

의자에 꽂혔던 여행

얽히고설켜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11월의 두 번째 주말,  짧은 1박 2일 기차 여행을 다녀왔다. 날짜가 가는 줄 모르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좋은 시기 다 놓치고, 2주 전에 부랴부랴 교통편을 예매했고, 숙소를 예약했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두툼한 겉옷을 입어야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낮 기온은 20도를 넘나드는 포근한 날이 이어져 여행을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단풍이 절정일 거라는 친구들의 말에 맘을 한껏 부풀리며 금요일 저녁,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먹었고,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전날 저녁 미리 준비해 둔 아침거리를 챙겨 먹었고 퇴실 시간에 맞추어 숙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번 여행의 주요 일정은 '산책'이었다.









 숙소 맞은편에 있었던 작은 공원으로 발걸음으로 옮겼다. 공원은 제법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제법 세월의 흐름이 묻어나는 벤치와 주변에 떨어진 알록달록 낙엽들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지나치기가 아쉬워 휴대전화 카메라의 버튼을 열심히 눌러보았다.







이번 여행은 가을의 향기를 듬뿍 담아 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벤치가 눈에 띄었다. 벤치는 주인이 없는 상태였지만 주변을 둘러싼 단풍과 낙엽으로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앉아도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가만히 있기에는 기온이 조금 쌀쌀했다. 벤치에 눈길 한 번 주고 계속 걸어 나갔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하천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하천은 제법 물길이 넓었고,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수심도 꽤 깊어 보였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또 내 눈에 들어온 존재들, 이번에는 각양각색의 의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집 출신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아마 여기저기서 안 쓰는 의자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이사 왔음이 분명해 보였다. 천변 산책길 약 500m마다 하천의 폭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 아래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다양한 모습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다리 아래 그늘을 지붕 삼아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포장마차에서 쓸 법한 등받이 없는 의자도 있었고, 제법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의자도 있었다. 아래층과 층간 소음 갈등이 있었는지 테니스 공을 신발 삼은 녀석도 있었다. 저 의자 하나하나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겠구나! 함께 걷던 친구에게도 나의 이 재미난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의자 좀 봐, 되게 다양하다. 모두 다 다른 집에서 온 아이들인가 봐."

"......"

"테니스 공 신발도 좀 웃기고, 의자가 여섯 개인데, 다섯 종류네."

"......"

"어디서 저걸 다 구하셨을까?"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좋은 가을날, 따스한 분위기를 띄우려는 나의 노력에 친구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소리야?"

"야, 너 저 의자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담겨 있는 줄 아냐?"





친구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저 의자가 이런 산책로에, 다리 밑에 놓여있는 것은 불법이라는 이야기다. 저 의자를 불법 점유물로 볼 것이냐, 불법 투기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의자를 처리하는 부서가 달라진다고 했다.

"저 노란 스티커 보이지?"

"어, 불법 뭐라고 쓰여있네. 근데 찢어져 있어."

"저 스티커가 무얼 의미하는 줄 아냐?, 저건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는 의미야."

의자가 놓여있지 말아야 할 곳에 의자가 놓여 있었기에 신고를 한 거라고, 그래서 지자체에서 경고 스티커를 붙인 거라고. 물론 천변 산책로와는 관계없이 대형 폐기물 처리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버렸다가 붙은 스티커일 수도 있다.




 맞다. 다리 아래에는 저런 사유물이 놓여 있으면 안 된다. 엄연히 지자체가 관리하는 땅이다. 더군다나 저 의자 위에서 어른들이 술을 마셨다든가, 혹시 음악을 켜고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저 노란 스티커가 천변에서 얻은 훈장이라면 분명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저 의자의 주인들이 정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담소만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문제가 있었다. 집중 호우로 하천에 물이 불어나 의자가 물에 잠겨 떠내려가기라도 한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은 어떨까? 이웃들과 도란도란 모일 장소가 딱히 없다면,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어르신들이라면? 잠깐이라도 모여서 서로 말벗도 하고, 위로도 하고, 공감도 하면 몸과 마음의 건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서로의 안부도 확인하는 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는 장소가 조금 더 넉넉했다면 다리 아래 의자가 놓이는 경우의 수는 줄지 않았을까?




 나의 생각은 단순 무식하고 지극히 한 면만 바라보는 입장일 것이다. 저 의자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담당자들의 입장은 또 다를 것이다. 의자 주인의 입장, 그 의자를 바라보는 나의 입장, 그리고 저 의자를 판단해야 하는 이의 입장. 그런데 세상은 또 그런대로 돌아간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혜택을 보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고, 누군가는 따스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흡족해한다.




 세상이 그저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다들 묵묵히 공공을 위해 한 걸음씩 물러나기 때문이겠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다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아니라 법과 질서를 지켜 나가기 때문이겠지. 이 와중에 소심한 자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시스템은 점점 더 개선되고 발전하기를. 그리고 그 발전을 위해서 모두가 관심을 갖기를, 그리고 용기 내어 목소리를 높여 보기를!' 마음으로 외쳐 본다.




근데 나는 여행지에 와서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의자 생각은 접어두고 다시 산책에 집중해 본다. 역시나 우리나라의 가을은 참 아름답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겠지만, 이 가을의 찬란함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행복하게 즐길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참새들이 토실토실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