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의 이야기 2

어긋난 부부

by 소극적인숙


그리운 사람들을 꿈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수연은 이대로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 재현,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윤찬, 보고 싶었던 친구와 지인들을 한 명씩 꿈속으로 불러냈다. 수연과 윤찬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사랑의 시작은 윤찬이었지만 끝내 헤어짐 이후로는 그녀의 끝사랑이자 첫사랑은 윤찬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수연은 여태껏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서럽고 속상했던 시간을 견디며 보내왔다.

재현과는 다정한 부부사이도 아니었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며 노력을 해왔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 둘이 독립을 하면서, 재현도 서서히 유순하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잉꼬부부까지는 아니었지만, 중년시절에 비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연은 남들처럼 누군가의 아내로, 아이들의 다정한 엄마로 남기 위해 빡빡한 살림 속에서 참으로 애써왔다.

아파트 한 채를 날린 재현을 원망하며 속앓이를 해왔다.

그게 화병이 돋아, 우울증에 갱년기까지 겹치니 죽을 맛이었다.

당연히도 그걸 모르는 시댁이기에, 수연을 구박하며 들들 볶고, 며느리를 쥐 잡듯이 굴어도 참고 견뎌냈다.


가끔 수연은 설거지를 하다가도 분통이 터져서

'어쩌다가 내가, 왜 이 사람과 엮여서...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생각했다.

억울하고 화도 났지만 별 수가 없었다.

남편 재현은 그저 시댁 눈 밖에 나면 안 된다는 말만 할 뿐, 이렇다 할 방법도 묘책도 없었다.


네 식구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곳간도 떨어지고, 살림이 점차 어려워져 갔다.

주식과 부동산으로 손해를 본 재현은 수연을 볼 때면 돈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들에게 도움을 빌자며 서서히 압박했지만, 수연은 재현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먼저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요. 우리가 지내온 결혼생활, 아이들 양육부터 그동안 경제적 어려움이 어땠는지를 얘기드리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


그럴 때면 재현은 늘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내가 얘기 꺼내면... 어떡해. 당신이 말 좀 해봐."


한 숨을 쉰 수연은

"여보가 먼저 다 생각하고 결정한 거잖아요. 본인이 전문가라면서요."


일그러진 표정을 보인 재현은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럼! 이게 다 너 책임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소리야? 너는 아무 잘못 없고, 아무 책임 없다고?"


갑자기 큰 목소리에 조금 놀란 수연이었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시작을 하게 된 계기와 상황, 그 생각도... 당신 머릿속에서 나온 거니깐... 아버님과 더 대화로 잘 풀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답답한 듯 재현은 수연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나 유산 제외야. 난 나가리라고. 우리 아빠가 어떻게 할지! 눈에 뻔히 다 보이는데! 절대 지원, 일절 없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고!"


수연은 두 아이들을 양육하며 엄마로서의 책임과 역할, 의무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혼을 수도 없이 생각하고 외쳤지만, 그건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바깥에서는 일 잘하는 남편, 배려심 있고 의리 있는 동료이지만 가정에서는 다른 모습에 서운했다.


신혼을 지나 적당히 중년의 부부로 들어선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남편은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적을 수 있을 거라며.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며 참아왔다.


'애들도 보고 있는데... 자꾸 돈 얘기 꺼내면 아이들이 걱정할 텐데...'


수연은 재현을 다시 토닥이며 조용히 설득해 봤다.

"당장 눈앞을 생각하지 말고요. 여보 그동안 자격증 따고 공부한 것도 있고, 학위도 있잖아요."

"그걸 좀 활용해 봐서 다른 일거리들도 좀 찾아보는 게 어때요?"


재현은 무표정을 보이며 수연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거... 다 승진 가산점용이잖아. 그걸 당장 뭐 어떻게 쓰라는 거야. 지금 오늘내일하는데, 내 발등에 불 떨어진다고!"

"됐어. 그만 얘기하자... 뭐 방법도 없잖아?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수연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재현을 바라봤다.

'당장 공과금이랑 아파트 관리비, 그리고 집세도 내야 하고... 애들 교육비는 어쩌고... 생활비를 안 준지가 몇 년째야.'

'내가 투잡이라도 뛰어야 할까, 그러면 애들은 누가 봐야 하지? 누가 지켜주지?'

'나는 우리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고 싶은데...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내가 그걸 허물어야 하는 상황이 왔어.'


휴대폰을 바라본 수연은 '엄마'로 저장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예, 엄마. 저예요."


반가운 목소리로 받은 수연의 엄마는

"어. 그래. 뭐 하고 있었어? 애들은 자니?"


"네, 방금 막 잠이 들었어요.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수연의 엄마는

"응, 저녁밥 먹고 가끔 산책도 하고, 약 먹으니깐 좀 나아."


조금 안심이 된 수연이었다.


"다행이네요... 아빠는요? 주무세요?"


"네 아빠는 일찍 잠들잖니... 엄마는 원래 야행성이고..."


갑자기 수연은 각 방 쓰는 부모를 상상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큭... 큭... 맞아요. 엄마 또 야식 드시고 영화 보신 거 아니에요?"


"어. 맞아! 어머 어떻게 알았니, 요즘 재미난 게 너무 많아. 세상 참 좋아졌다?"


"네. 요즘 채널도 다양하고 볼거리가 참 많죠."

"그냥 엄마 잘 주무시나, 아빠는 어떠시나 전화해 봤어요."


수연은 미처 친정 엄마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혔다.

힘든 결혼생활을 할 거라는 아빠의 이야기가 아직도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수연의 엄마는 편견 없이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냐며, 재현의 직업을 좋아하셨지만 아빠는 걱정이 많으셨다.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노부모님에게 의지하는 일이 더 많이 생기고 있었다.

참 야속하고 마음이 아파왔다. 수연은 그래도 견뎌야 하니깐, 분명 좋은 돌파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따뜻한 엄마의 목소리를 위안 삼아 통화를 끊고 잠자리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수연의 기척을 느낀 재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거... 영준엄마 얼른 씻고 와."


"네? 왜 빨리요? 갑자기... 나 이거 주방 정리 좀 해야 하고 여기 거실 뒷정리도 해야 해요."


재현은 짜증을 부리며 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룰 건데? 우리가 부부관계 안 한 지 일주일 지났어."


수연은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었다.

"오늘은 진짜 내가 너무 힘들어요... 힘들어. 애들 봐주랴, 숙제 도와주고 설거지하고, 나도 못 씻었어요."


"아! 그러니깐 지금 씻고 하면 되잖아?! 어? 넌 도대체 왜 그래?"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현은 다급하게 아랫도리를 붙잡으며 수연을 바라봤다.

성난 얼굴이었다.


수연은 재현의 얼굴이 참으로 고약하고 못되게 보였다.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픈 아내한테 자기의 성욕을 무작정 채우는 남편이, 인간의 탈을 쓴 악마처럼 보였다.


인상을 팍 쓰는 재현은

"너는... 늘 그러지. 다 싫다며, 매번 힘들다고 그러고. 도대체 안 힘든 날이 언제야?"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실까?"


한숨 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연은 남편 재현을 바라보며 옷을 다 벗었다.

그리고 던져버렸다.

"그래. 늘 힘들어, 나는! 아내가 왜 힘들까? 왜 피곤해할까? 생각해 본 적 있어?"


아무런 대꾸도 없는 재현은 그대로 위아래로 수연을 훑어봤다.

그런 재현을 보는 수연은 한심하다는 듯

"아프다는 아내를 챙겨주지는 못할 망정, 그저 부부관계만 요구하는 사이, 이젠 지긋지긋하다."


갑자기 덜컥 화내는 재현이었다.

"말이 좀 심한데? 그리고 말 또 너무 쉽게 놓는다?"


"당신한테는 좋은 말이 안 나와요. 상대방이 따뜻한 말로 건네줘야 오고 가는 게 있죠!"


"너는 늘 그런 핑계를 되잖아... 참... 아주 발악을 하네."


"발악이요?"


수연은 씩씩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다 벗은 몸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손가락을 들며 소리쳤다.


"발악이 뭔지 아직 모르는가 본데, 진짜 발악을 보여줄까요?"


"아... 됐어. 됐고, 오늘은 무조건 하고 자야 해. 넌 좀 이상해."


"이상한 건 당신이고요. 일단 어차피 씻을 거니깐... 빨리 끝내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재현은 갑자기 강하게 나오는 수연이 겁났다.

"아... 어 알겠어. 이불 깔아놓고 기다릴게."


욕실에서는 샤워기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오 분도 안되어서 수연은 서둘러 나왔다.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수건으로 툭툭 털며 몸의 물기를 그저 빨리 닦아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수연이었다.

재현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듯 서둘러 조명을 껐다.


"아! 뭐야... 보이지 않잖아. 어두운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냥 해요. 빨리 해요. 애들도 깨니깐... 진짜 빨리 끝내요. 난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재현은 쳇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휙 돌리며 서둘러 수연을 감싸 안으며 온기를 불어넣었다.

수연은 그 온기가 불쾌하고 싫었는지 등을 휙 돌리고 얼굴을 보지 않았다.

마주 보고 부부관계를 하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수연은 그저 먼 산을 보듯 감정 없이 그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아무런 감흥이 없어. 사랑이 없는데... 아픈 사람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무슨 부부관계가 만병통치약 마냥 모든 게 다 풀릴 거라는 식이야.'


'내 마음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 봐준 적 있나? 오로지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야.'


그렇게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어긋난 하모니를 보는 듯, 두 사람은 맺어지고 있었다.

단조롭게 재미없이 그저 박자만 겨우 맞추며,

두 사람의 사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잔인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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