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붓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수연은 전보다 더 세심하게 그려 넣은 갈대들을 중간에 멈추고 멀리서 한 번, 가까이서 한 번 바라봤다.
채색한 작업들은 마치 제 역할을 하듯 바람에 실려 춤을 추었고, 풍경 속에 있는 인물들은 살아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아마도 어떤 선명함에 이끌려 수연은 더 짙게, 더 강하게 터치를 해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소처럼 붓끝에 묻은 물감을 덜어내고 닦은 후 다시 손을 쥐었다. 그런데 손아귀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몸에서는 열기가 느껴졌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가볍게 닦아내자 빛에 반사된 땀들이 축축하게 묻어났다.
그 뒤로 눈을 한 번, 두 번 깜빡이는 순간 눈앞에서 반짝거림이 보였다. 희미했던 빛깔은 서서히 눈앞으로 다가왔고, 수연은 중심을 놓치며 휘청거렸다. 이미 등까지 젖은 땀들로 온몸은 축축하고 흘러내리는 듯 쳐졌다. 수연은 무너짐을 느꼈다. 그리고 간신히 숨을 고루 내쉬며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그녀는 고개를 위로 향하며 내리쬐는 빛을 손바닥으로 가려 보았다.
'왜 눈부시지, 왜 이리 더울까.'
이번에는 양손을 모아 눈부심을 가리고 숨을 천천히 고르며 호흡에 집중했다. 하지만 빛은 점차 그녀를 삼켜버리듯 다가왔다.
"이상해...! 온몸이 떨려. 발 밑이 왜 이리 흔들리지?"
수연은 당황하며 가까운 벽에 기댄 채 눈을 간신히 치켜뜨며 이 상황을 버티려 했다. 하지만 귀에서는 요동치는 북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수연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지만 거대한 빛이 그녀를 집어삼켜버렸다.
.
눈을 뜨자, 수연은 젊은 날의 황금빛으로 둘러진 갈대밭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지금 내가 어디?"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가을의 흙냄새는 그녀의 코 끝을 자극했다.
수연은 철새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조금 떨어져서 걸으며 점점 멀어지려 했다.
수연은 사람들 틈에 어울리고 싶었지만 황금빛으로 둘러싼 갈대들이 그녀를 놔주질 않았다.
그녀가 속해 있는 이 갈대밭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꿈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울 만큼 보다 더 생생했다.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조차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졌다.
몸은 활기가 돌았고 생각은 보다 더 또렸했다.
수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변의 공기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어떤 한 사람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데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어깨너머로 반사된 금빛 햇살과 목 라인, 익숙한 걸음걸이.
잠깐 옆으로 보이는 턱과 미소로 올라간 광대.
수연의 심장은 빠르게 박동하며 그녀의 입에선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흔들리는 갈대밭에 이끌리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연은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폈다 해봤다.
뒷모습에 이끌려 한 사람을 지켜보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와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늦춰 보았다.
수연은 힘겹게 소리를 내며 말라 붙은 입을 간신히 열었다.
"... 윤찬...?"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윤찬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눈부신 빛이 갑자기 들어섰다.
그의 뒷모습은 잠시 재현의 얼굴로 겹쳐 보였다.
갑자기 갈대밭이 크게 출렁인 뒤 고요해졌다.
몇 초가 흐른 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수연은 숨이 멎는 듯, 순간 움켜쥔 손을 가슴 위에 올려 눌렀다.
붉게 상기된 얼굴,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 남자를 마주해야 했다.
"당신... 정말 당신...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