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가 아닌 거 같아

by 소극적인숙


수연은 그 남자가 윤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수연의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고, 그의 따뜻한 눈빛에 이끌렸다.

그녀의 시선은 마침내 윤찬의 얼굴에 닿았다.

수연은 긴장한 탓에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바람에 스치는 갈대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차갑게 스쳐갔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수연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수연아! 수연아!"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와 마주치면 여기서 멈출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서둘러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빠르게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았다.

윤찬은 그녀를 따라잡으며 되돌아가는 수연을 향해 소리쳤다.


"수연아, 수연아! 어디가! 그만... 그만 가!"

그 말을 듣자 수연은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윤찬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소 짓는 입가에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 반짝이는 눈빛에 반달 모양으로 살짝 내려간 부드러운 눈가.

꿈속에서 그리기만 했던 윤찬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시 봐도, 정말로 윤찬이었다.

꿈이라도 좋으니, 이곳에서만큼은 오래도록 긴 여정이 되기를 바랐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터져버린 감정 때문인지 수연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윤찬은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없이 바라봤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수연에게 다가갔다.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수연의 눈높이에 맞춰, 다리를 구부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빨갛게 된 수연의 눈을 보며 윤찬은 시선으로 그녀를 읽어보려 했다.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거야, 놀랬잖아. 왜 토끼눈이 되었어."

수연은 가깝게 다가온 그를 보고 당황했다.


('이상하네, 내가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걸 모르는 건가?')


"......"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수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윤찬은 알쏭달쏭한 표정 지으며 물었다.


"왜 그래~수연아, 표정도 굳어있고... 무슨 힘든 일이 있었어?"


"우리 이쁜이가 이상하네. 여기 갈대밭 보러 같이 왔는데 혼자 저 멀리 뛰어가고."

수연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온 이 상황이 꽤나 벅차 보였다.

속으로 감정을 삼킨 채 힘겹게 입을 뗐다.


"바람이 불어서 눈이 시렸나 봐. 저기... 목마르지 않아?"

수연의 말에 윤찬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기만 하고 마실 걸 챙기지 못했네. 근처 편의점을 찾아볼까?"


"......"

윤찬은 대답이 없는 수연의 눈치를 자꾸 살펴봤다.


"그럼 카페에 들를까? 아니면 앉아서 마실 곳을 찾아볼까?"


"응, 그래."

대답이 끝나자 윤찬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따라 자연스럽게 맞잡은 두 사람은 갈대밭을 다시 걸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되면 그때 나에게 말해줘."

수연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윤찬과 수연은 황금빛으로 물든 갈대밭 산책로를 걸었다.

더 걷다 보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두 사람만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주변은 평화로웠다.


순천만 갈대밭을 찾은 희귀 새들은 미소 짓게 만들었다.

자연의 경관을 본 두 사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일몰로 붉게 물든 하늘을 보자 수연은 심장이 재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설레는 감정이 몽글하게 다시 커졌다가 오므라졌다.

풍경을 담아내는 작가들처럼 수연도 이곳을 사진으로 담아보고 싶었다.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윤찬을 향해 말을 걸었다.


"윤찬아, 혹시 카메라 챙겨 왔어?"


"응, 가져왔지. 당연히 챙겨 와야지."


"그럼 잠시 빌려줄래? 풍경을 담아보고 싶은데..."


"그럼~좋아. 갈대밭만 사진 찍을 거야? 잘생긴 나는?"

윤찬의 말에 긴장이 풀린 수연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너도 함께 사진 찍어줄게! 서로 찍어주면 되겠네."


"딱 좋다. 그럼 우리 두 사람은 어떻게 사진 찍지?"


"우리가 각도를 알아서 조절해 보면 되지."

수연의 제안에 윤찬은 먼저 촬영을 시작했다.

갈대밭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정면보다는 측면이 더 잘 나오게 포즈를 취했다. 그 뒤로 수연도 비슷한 포즈로 촬영을 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함께 찍을 사진으로 재미난 포즈를 한 가지씩 정하기로 했다.


가을의 마지막 여행지가 될 거라 생각한 수연은 뒤돌아보며 멈춰 섰다.

윤찬과 다시 만난 그 순간의 설렘과 기쁨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팻말을 보며 펜션 인근에 있는 카페를 찾아 방문했다. 메뉴판을 보며 각자 마실 음료와 디저트 메뉴를 정하는 모습이 어느 연인과 다름없었다.

윤찬은 수연을 살피며 물어봤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괜찮아."


"평소와 달라서 걱정했어. 무슨 일 있었어?"


"그건 아닌데... 내가... 내가 아닌 거 같아서..."


"으응? 왜?"


"그럴 때 있잖아.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간과 여기 펼쳐진 상황이..."


"어... 어. 계속 얘기해도 돼. 괜찮아."

윤찬은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끔 내가 이상하다고 여겨질 때 있지 않았어?"


"글쎄... 나는 뭐랄까... 둔해서 그런가. 잘 모르겠던데..."

윤찬은 웃으며 에둘러 대답했다. 그의 표정을 보며 수연은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피곤해서 집중력도 떨어지고 헛소리도 나오네."


"남자친구인데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너에게 털어놓으면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봐... 걱정돼."


"수연아, 나는 말이야. 네가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면... 그거면 돼. 정말이야."


"알겠어. 때가 되면 내가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그때 말할게"


"그래, 그렇게 하자. 우리 여기서 맛있는 거 먹고 기운 차려서 집에 가야지."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다 먹고 난 뒤, 서둘러 두 사람은 떠났다.


긴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서울에 도착하자,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윤찬은 팔과 어깨를 돌리며,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흐아암, 수연아 다 왔어. 많이 늦었네."


"응, 고생 많았어. 윤찬아! 장거리 운전하느라 힘들었지?"


"괜찮아.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봐야지. 이제 나도 조금 있으면 바빠지는데..."


"그래, 이제 다시 공부해야 하잖아. 그전까지는 충전이 필요하지..."


"응! 너와 함께면 무조건 충전이지!"

수연은 윤찬의 농담에 마음이 풀렸는지 굳은 표정마저 함께 풀렸다.


"치이... 웃겨... 이따가 문자 해."

"알았어. 이쁜이, 코 잘 때 연락해."

"응, 조심히 들어가."


집으로 돌아온 수연은 불을 끄고 누웠다.

피로감에 몸은 축 꺼졌는데,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윤찬과 재회를 시작으로 펼쳐진 하루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현실 같지 않은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무력감을 느꼈다.


"어쩌면 꿈일지도 몰라. 정신 차려보자."

거울을 보며 수연은 양볼을 크게 꼬집어봤다.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보자 수연은 손으로 비비며 부기를 가라앉혀봤다.

그녀는 이번 삶이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거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그녀에게 열렸다는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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