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엄격한 채식 식단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일주일에 딱 하루만 채식 지향의 음식을 해 먹으며 건강한 생활 습관을 만들어 가자. 당장 실행할 수 있고, 오래 지속가능한 실천만이 삶을 바꿀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은 <52일 채식주의자>의 여섯번째 그린데이였다.
별 다를 것 없는 12월 31일을 보내고 1월 1일 아침을 맞이했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이 대단한 행사라도 되는 듯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자정을 넘기고야 자러 들어갔다. 아침이 밝았는데도 온 집안이 조용하다.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몇 개의 카톡 메세지가 도착해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띈다.
미국 유학 시절의 룸메이트다. 그녀와 나는 출국자 모임에서 만나 같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온 유학 동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 그녀는 미국에 남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밤낮이 다른 시간 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아니 몇 년에 한 번 드문히 안부를 전하며 산다. 아이들 사진을 주고 받으며 근황을 묻다 지난 해 그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서로의 부모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이 아팠다.다시 한번 돌아가신 어머님의 명복을 빈다.
그녀와 얘길하다 보니 오래 전 유학생활이 떠올랐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독립하지 않은 성인 자녀의 삶은 미성년 자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몸 하나 챙기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당하다,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산다 믿었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부모님 집에서 살았고, 청소, 요리, 빨래는 다 엄마의 일이었다. 빨래가 밀리면 짜증을 냈고, 반찬이 맛 없다고 불평하던 철부지였다.
그렇게 살다 독립이란 걸 했으니 생활이 잘 돌아갈 리 없었다. 야심차게 도전했던 공부도, 가슴 설렌외국 생활도 쉽지가 않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 미국 여행이라도 한 번 했다면 내가 유학이란 걸 결심했을까 싶다. 영어도 잘 못하고, 외국 경험도 없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겁도 없이 유학을 떠난 건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힘든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주말에는 같은 처지의 학생들끼리 모여 작은 파티를 열었다. 한국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한 집에 모여 밥을 해서 나눠 먹는 게 전부였지만 함께 먹은 밥 한 끼가 다음 한 주를 버틸 힘이 되곤 했다. 내 요리의 역사도 그때 함께 시작됐다. 주중에는 그저 끼니를 때웠고, 주말에야 요리다운 요리를 해 먹었다. 당시 유행하던 요리책 '나물이네'를 펴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들 손을 보태 거들었는데 누구 하나 요리에 익숙하고 잘 하는 사람이 없었다.모두가 서툴렀다. 그런데도남자 여자 구분할 것 없이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자기 일을 찾아했던 것 같다. 먹고 치우는 일이 공평하게 나눠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은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결혼 전 남편도 요리를 꽤 했다. 남편 역시 매일 요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김치찌개 같은 것을 한솥 만들어 일주일 내내 먹었다고 했다. 남편은 레시피에 충실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매번 할 때마다 같은 맛이 유지됐다. 남편이 맛있게 한 요리를 기억해 뒀다가 다음에 또 해달라 말하면 전과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맛이 났다. 남편과 나는 같은 해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해인가 남편은 요리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내가 없는 날 있는 반찬을 꺼내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을 뿐 남편이 요리를 한 지는 오래 되었다. 남편은 나더러 요리를 잘 한다고 한다. 그럴리가. 굳이 나누자면 내 요리는 맛 없는 쪽에 가까울것이다.그런데도 요리는 내 일이 됐다. 잘 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요리 뿐이랴.
방학에는 아이들에게 간단한 요리를 가르칠까 한다. 뜨거운 물을 조심하란 말에 아이들은 라면을 끓이는 것도 겁내 한다.인덕션을 켜고 끌 줄도 모른다. 재교육이 필요한 시기이다. 라면 끓이기, 계란 후라이 만들기, 즉석 음식 데워 먹기 정도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밀고 있는 삶의 메세지 다음 두 가지이다.
1. 자기 스스로 돈은 벌고 살아야 해.
2. 자기 스스로 밥은 차려 먹고 살아야 해.
1번은 나중 일이니,2번부터 천천히 가르칠 생각이다.
1월 1일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52일 채식주의자>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벌써 6주가 지났다. 채식 식단을 통해 삶의 변화를 만들어 가겠다는 목표에는 근접도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먹고 사는데 마음이 간다. 좀 덜 힘들고, 좀 덜 괴롭다.
The 6th Green Day
한 봉지씩 먹기 좋은 크기로 포장되어 있다. 눈꼽만한 마시멜로까지 들어 있으니 아이들 간식으로 딱이다. 우유 한 잔 부어주면 한 그릇 뚝딱이다.
채식 지향 식단이라며 "죠리퐁 마시멜로"를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여튼 아침은 죠리퐁 한 봉지에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이들 겨울방학 전 마지막 화요일이라 혼자 먹는 마지막 아침 식사였다. 내일부터는 삼시 세끼 아이들과 함께다. 방학은 정말 소중하다. 학교의 소중함과 급식의 감사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코로나 시국에 방학인듯 방학 아닌 2년을 보내고 있지만, 정식으로 방학이 시작된다니 긴장감이 몰려온다.
채식 지향 식단이라며 "계란 토스트"를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다(X2). 여튼 점심은 계란을 풀어 채 썬 양배추를 추가한 후 토스트를 해 먹었다. 그래도 양배추를 추가했고, 통밀 식빵을 먹었으니 죄책감을 조금 덜 느껴도 될까. 까끄러운 통밀 식빵은 우유 식빵보다 별로지만 몸에는 더 좋다고 해서 한 번 사 봤다. 버터를 바르고 구우니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
저녁으로는 순두부 찌개와 간단한 밑반찬을 먹었다. 저녁에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큰애가 순두부 찌개를 외쳤다. 그러면 배달시켜 먹자고 했더니 채식 데이에 무슨 배달이냐며 지구 환경을 생각하잖다. 맛있는 순두부 찌개를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큰애가 몰라준다. 집에 순두부가 있긴 한데 양념을 할 생각을 하니 머리속이 하얗다. 다행히 지난 번 떡볶이 가게에서 얻은 고추장 양념이 남아 있었다. 대충 국물을 내고 떡볶이 가게의 고추장을 섞으니 그럭저럭 맛이 난다. 냉장고에 칼국수가 놀고 있어 칼국수도 한줌 넣었다. 순두부찌개는 점점 산으로 향해간다. 내 요리가 엉망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간에 꼭 샛길로 빠져서 실험적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하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이런다.
늦게 들어온 남편이 뭐 먹을 게 없나 부엌을 뒤진다. "순두부 칼국수 어때?" 물었더니, 한 번 먹어 보겠단다. 본격적인 야식은 안하는 사람이라 그냥 한 번 물어본 건데 내 꾀에 내가 넘어간다. 저녁 먹고 남은 순두부 찌개에 고추장 한 스푼과 칼국수 1인분을 넣고 팔팔 끊인다. 한 번 우러난 찌개와 업체표 고추장의 위력은 대단하다. 남편은 맛있다며 칼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아무래도 떡볶이를 한 번 더 시켜야할 것 같다. 고추장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