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엄격한 채식 식단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일주일에 딱 하루만 채식 지향의 음식을 해 먹으며 건강한 생활 습관을 만들어 가자. 당장 실행할 수 있고, 오래 지속가능한 실천만이삶을 바꿀 수 있다믿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은 <52일 채식주의자>의 첫번째 그린데이였다.
The First Green Day
<52일 채식주의자>의 그린데이를 화요일로 정한 것는 일주일 중 월요일, 화요일이 가장 한가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나가고 나면 천천히 장을 봐서 첫번째 채식 식단을 준비하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월요일에 갑자기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겼다. 지금 체력으로는 다녀 와서 장을 보는 게 무리라 느껴졌다. 그래서 과감히 결단을 내린다. 그래, 첫번째 그린데이는 "마켓컬리"와 함께 준비하기로 하자! 시간과 정성을 들여 눈으로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하는 쇼핑은 다음 주에도 가능하지 않겠어?
통마늘, 소금, 깨소금, 샐러드 드레싱(좌)/ 당근과 대파는 손질된 걸로 구입했다.(우)
두부 한 모에 질려 포두부, 면두부 요리를 해보려고 한다.
솔직히 적은 용량으로 잘라 파는 마트의 야채들을 선호한다. 당근 한 개를 사서 한 개를 다 먹어본 기억이 없는 나는 이번에도 손질된 작은 당근을 구매했다. 흙이 묻은 당근 한 봉지는 여전히 살 엄두가 안나지만 감자한 봉지, 고구마도 한 상자 주문했다. 일주일에 하루, 한 두 끼만 해 먹으면 되는 건데 어째 이것 저것 너무 많이 시킨 것 같다.
월요일 저녁 서울 들어오는 길이 꽉 막혀 집에 도착하면 8시가 넘을 것 같았다. 저녁은 간단히 피자를 먹으라 하고 늘 하던대로 피자 두 판을 시켜줬다. 남은 피자는 항상 다음 날 아침으로 먹어 없앤다. 늦게야 집에 도착해 피자 한조각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긴다.
내일은 그린데이인데, 남은 피자는 어떡하지?
네 식구, 피자는 항상 두 판을 주문한다. 기본으로 두 끼는 해결하자는 마음으로 시킨다.
남은 피자가 상할까봐 걱정한 게 아니라 무심코 먹을까봐 걱정한 것이었다. 배달 피자는 왠만해선 상하지 않는다. 일단 피자는 먹지 말라 단속하고 아침에는 제철과일(귤)과 에프에 돌린 고구마를 차려 주겠다 말한 뒤 잠이 들었다. 비염이 심해 알러지 약 한 알을 먹었더니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식구들이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에 나는 결국 일어나질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먹으라 말했고, 첫번째 그린데이의 아침식사는 어제 먹고 남은 식은 피자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점심에는 2년간 코로나로 만나지 못했던 동네 지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가까이 살면서도 한 번을 못 모이다가 위드 코로나 후 조심스레 소집된 만남이었다. 우린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고기없는 쌀국수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직화구이 소고기 쌀국수"를 주문했다. 사람들과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건데 식단에 구속받고 싶지 않았다.
쌀국수는 고수와 숙주나물 아닌가? 파와 부추가 잔뜩 들어간 쌀국수, 9000원짜리 고급 음식이다.
그냥 다음 주부터 시작할까?
이런 생각이 스쳤다. 원래 준비 좀 해서 12월이나 신년부터 시작할 작정이었다. 아이들이 그냥 해 보자 해서 무모하게 도전했는데 한 거라곤 마켓컬리에서 야채 주문한 게 전부다. 점심까지 쌀국수를 먹고 났더니 졸리고 피곤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하기로 했으니 저녁 한 끼라도 준비해 본다. 잡곡쌀로 밥을 안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김치찌개는 그나마 내가 잘 하는 요리인데, 고기나 햄을 넣지 않고 하려니 자신감이 떨어진다. 두부 한 모를 잘라 반 모는 김치찌개에 넣고 반 모는 잘라 기름에 부쳤다. 김치찌개 하는 날 두부 부침은 세트로 따라 나온다. 안 그러면 남은 두부 반 모는 어떻게 처리하나?
아버지 댁에서 자주 만드는 오이 무침을 하려고 올리고당과 쌈장의 유통기간을 확인했더니 모두 2020년이다. 바로 버리고, 어느 식당에서 준 초고추장을 찾아 오이를 버무린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더 나올까. 식단을 하기 전에 냉장고, 팬트리 청소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엄두가 안 난다.
아무래도 김치찌개가 맛이 없을 것 같아 달걀말이를 메뉴에추가한다. 달걀은 정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식재료이다. 달걀만 있으면 뭐라도 하나 만들어 반찬을 늘릴 수 있다.
노 코멘트로 코멘트를 대신한다.
그렇게 완성된 <52일 채식주의자>의 첫번째 저녁 밥상이다. 솔직히 이런 식탁을 보여주는 게 창피하다. 수많은 요리 블로거와 유투버들이 보면, 아니 요리 좀 한다는 중학생이 보고도 웃고갈 밥상이다. 정녕 이것이 엄마 경력 14년차의 식탁이란 말인가?
김치찌개는 정말 맛이 없어서 거의 다 남겼다. 차라리 김치를 그냥 먹는 게 나을 뻔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음식이 맛있어서 남이 한 음식을 못 사먹겠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내가 한 음식이 맛이 없어서 음식을 못해먹는 거다.
오랜만에 부엌에 서서 김치찌개부터 다른 반찬까지 하고 나니 밥맛도 사라졌다. 아, 이래서 내가 요리하는 걸 싫어했지. 보통 사온 반찬으로 저녁을 차리는데는 10분이 안 걸리는데 오늘 저녁처럼 단촐한 밥상을 차리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맞다. 밥을한다는 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 시간도 많이 들고 밥하다 정작 밥맛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은 그런 일이었다.
오래 부엌을 떠나 있다보니 정말 다 잊어 버렸구나.
이게 아닌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다 <52일 채식주의자>는 1회로 끝날 판이다. 이런 나에게 상냥한 것은 항상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다. 늘상 먹던 고기 김찌개가 아닌데도 아이들은 맛있다 해준다. 초고추장에 무친 오이는 처음인데도 억지로 한 두 개 입을 대준다. 계란과 두부 부침에밥 한 공기를 다 비운다.
일주일 하루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 정도는 부지런 떨고 정성을 쏟을 수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하루의 실천을 위해서도 하루 치의 의지는 필요했다. 해보겠다는 의지 없이 늘상 하던대로 하다보면 쉬워 보이는 일조차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원래 한 끼 전부를 손수 만들계획이 아니었다. 반찬 한 가지씩만 정성 들여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에만 들떠서 처음 먹었던 마음을 잊고 있었다. 다음 주 그린데이에는 채식 반찬을 몇 가지 사 놓도록 하자. 요리 딱 하나만 해 보기로 하자. 쉽게 더 쉽게 다시 시작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