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담 Feb 19. 2024

고시원에 사는 기러기 아빠 김 씨의 근황, 이혼이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했건만, 기러기 아빠 김 씨는 끝끝내 복권 당첨에 실패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를 않는 걸까. 김 씨와의 징글징글한 인연은 끝날 줄을 모른다. 최후통첩을 날린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김 씨는 우리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태까지 미납금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매달 일부 금액을 입금하고 있으며, 꼬박꼬박 연락도 잘 된다는 사실이다. 김 씨는 늘 우리가 먼저 돈을 달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선수를 친다.



"원장님, 이번달은 50만 원 중 30만 원 먼저 입금하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나머지는 언제까지 주실 건가요?"

"나머지는 2주 후에... 반드시…”

"계속 이렇게 하실 거면 돈 안 주셔도 되니까 제발 나가주세요."

으름장을 놔보아도, 효과가 없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가관이다.

"원장님, 저 정말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는 절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겁니다! 사람이 의리가 있지!! “

"휴... (의리 같은 거 안 지키셔도 됩니다..) 제발..!"



김 씨가 우리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였다. 100% 선불제인 고시원에서 늘 셀프로 50% 할인가를 지불하고 차일피일 미룬 것이 어느덧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원장 부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뭐가 그리 당당한지, 자꾸만 '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하는 김 씨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죽겠다. 그 잘난 의리는 이제 그만 지켜도 되니 제 발로 알아서 퇴실해 주면 좋으련만.



나는 이제 그만 강제로라도 퇴실을 시키자는 주의였지만, 남편은 그렇게까지 매정하게는 하지 말자 주의였다. 돈을 아예 안 내는 것도 아니고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꼬박꼬박 입금도 되고 연락도 잘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아예 나가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10개월간의 문자 기록을 보면 아주 시트콤이 따로 없다. 돈을 받지 못한 원장은 남은 방값은 안 받을 테니 제발 나가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고, 미납자 김 씨는 꼭 갚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믿음과 신뢰를 외치고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하나 남편이 매정하게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김 씨의 카톡 프로필 때문이다. 대체 그 카톡 사진이 뭐길래. 이제 그만 사달을 내서라도 끝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남편에게 성화를 부려 보지만 소용이 없다. 물러터진 사람 같으니라고.



"김 씨 말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사정 봐줄 생각이야? 이 정도면 우리도 할 만큼 한 거 아니야?"

"아니.. 그런데 늘 카톡 프로필을 보면, 우리 집 애들이랑 비슷해 보이는 딸 사진이 걸려있단 말이지. 애들 표정이 너무 해맑고. 게다가 카톡 프로필 문구는 늘 '아이들아 사랑한다, 보고 싶다...' 이렇게 쓰여있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근데 그거 설마 연출은 아니겠지? 솔직히 고시원에 사정없는 사람이 어딨어. 어떻게 좀 해보자. 응?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만하면 됐어. 그 사람도 이해할 거야. “

나도 말은 이렇게 매몰차게 했지만, 막상 내쫓을 생각을 하면 어쩐지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다.



지금까지 고시원을 운영하는 동안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지만,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은 있어도 돈을 안 떼어먹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처음 봤다.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나쁘다고 해야 할까, 꾸역꾸역 버티는 사람을 더 나쁘다고 해야 할까? 하루에도 열 번씩 측은한 마음과 괘씸한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벌써 다음 달 납입일이 코 앞에 와있다.



어김없이 돌아온 김 씨의 월세 납부일. 이번에도 먼저 선수를 친다. 띠링- 하고 도착한 문자 한 통.

이번엔 또 뭐라고 하려나?

"원장님..... 저.... 혹시 전입신고 가능할까요?"

"월세를 완납을 해야 전입신고를 해드리죠. 계속 미납하시면서, 전입 신고라니요?"

월세를 제 때 못 받는 것도 화딱지가 나는데, 전입신고까지 해달라니. 원칙 상 고시원 전입신고는 당연히 가능하지만 상황이 이러한데 순순히 전입신고를 해 줄순 없다. 뒤이어 궁금하지도 않은 개인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사실은 와이프랑 이혼 소송 중이에요. 주소지를 빼 달라고 하네요.”

“……”

아차! 훅 들어온 한마디에 하마터면 흔들릴 뻔했다. 얼마 전부터 고시원 분리수거장에 눈에 띄게 쌓이던 소주병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본다.

"그러시군요. 사정은 안 됐지만 남은 30만 원 완납하시면, 그때 바로 전입신고 해드릴게요."

이혼이라니. 요즘 세상에 이혼이 대수는 아니지만 김 씨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를 직접 들을 줄이야.



김 씨는 어떤 사람일까? 늘 자신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라고 말을 하는 김 씨. 한 번쯤 김 씨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것을. 차마 그런 질문은 직접 해보지 못했다. 아마도 김 씨는 자신이 입실료 정도는 꼬박꼬박 낼 형편은 되는, 타인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의리와 신뢰를 지킬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비록 완벽하게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갈 땐 나가더라도 반드시 완납을 하고 제 발로 당당히 걸어 나가겠다는 사람이지 않은가. 허나 현실 속 김 씨의 모습을 냉정하게 말하자면 얼마 되지 않는 입실료를 매번 미루며 2주 후에 갚겠다는 거짓말을 반복하는 고시원에 사는 처량한 이혼남일 뿐이다.



며칠 후 고시원에 청소를 하러 들렀다가 마주친 김 씨는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밝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혼 소송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밀린 미납금 이야기 먼저 꺼냈을 테지만 밤마다 유튜브를 안주 삼아 소주병나발을 불고 있을 처량한 모습을 상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만은 퍼붓고 싶은 말을 꾹 참기로 했다.



그래, 남편말 따나 아예 안 내는 것도 아닌데. 한 달에 20~30만 원 적게 들어온다고 해서 운영에 큰 차질이 있거나 내 인생에 중대한 타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더 마음을 너그럽게 먹기로 하자. 그냥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인생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했던가. 김 씨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달아올랐었는데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김 씨를 전적으로 믿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돈을 다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나 기대 자체를 내려놨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가진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에게 희망적인 기대를 품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일 일 것이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 혼이 날 때면,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가 "정말 너한테 실망이야."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회초리를 맞거나 손들고 몇 시간씩 벌을 설 지언정 실망스럽다는 말은 어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곤 했다. 생각해 보면 '실망'이라는 단어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있을 때만 생겨날 수 있는 감정이기에 상처를 주는 말임과 동시에 애정과 관심의 증거이기도 하다. 나의 애정과 관심을 더 이상 김 씨에게 쏟지 않기로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 싶지만, 나에게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김 씨.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는 지금, 하다못해 고시원 원장마저 당신에 대한 기대치가 1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김 씨는 지금 보다 더 훨씬 더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모르쇠로 일관하고 야반도주를 하거나 잠수를 탈 수도 있을 텐데 끝끝내 돈을 갚고야 말겠다는 김 씨의 대답은 어쩐지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돈을 갚아야만 비로소 김 씨는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던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최소한의 신뢰를 얻을 만한 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해당 글은 기러기아빠 김 씨의 사연 1,2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전편을 보시고 오시면 더욱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


2 평남짓 고시원에 사는 기러기아빠 김 씨의 사연[1편] (brunch.co.kr)


2 평남짓 고시원에 사는 기러기아빠 김 씨의 사연[2편] (brunch.co.kr)







 



작가의 이전글 고시원도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