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복 Mar 02. 2023

에라이, 길고양이만 못한 사람아

도망갈 때 보이는 것들

[경남사람 서울 상경기]


결단을 내려야 했다. 주식에 관련된 건 뭣도 모르던 나였지만 피싱, 1인 20역, 수익창 조작으로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본 이상 이 회사에 계속 다닐 순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올라온 서울, 난 집이 없었고 저녁을 때울 삼각김밥을 위해 카드를 긁고 대출을 해야만 했으며 결국 그것을 갚을 돈은 이 회사가 주는 것이었다.


일단 대출과 양심을 놓고 저울질하길 하루. 이틀 째엔 식사비, 사흘 째엔 미래를 놓고 고민했다.

상경할 땐 고양이를 데리고 출퇴근한다는 환상에 젖어 무작정 올라왔건만 서울에 온 지 딱 10일째 되는 날, 난 세상을 향해 눈치 보고 하루를 걱정하는 길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 콩타. 수면 중이다.


길고양이 땡복은 세상이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들어가지 말걸'하는 후회도 속으로 얼마나 삭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용기 내지 않으면 1년, 3년 뒤에도 난 양심을 이들과 함께 팔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상기하자 의외로 결정은 빠르게 내려졌다.


"그만두자(도망가자)"


그날 밤, 각종 시나리오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 사람들이 날 다신 찾지 않고 붙잡지 않으며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빠져나갈 방법이 무엇일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땡복의 고민은 아침까지 이어졌고 회사에 도착하기 10분 전, 나의 고향이 경상남도라는 것을 떠올렸다.

땡복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살아생전 스스로의 의지로 퇴사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대단히 큰 일인 줄 알았고(큰 일은 맞다), 여기엔 혹여 내가 해코지를 당하진 않을까 하는 가상의 두려움도 한 몫했으리라.




일단 땡복의 시나리오는 '집안에 큰일이 생겨 내려가야 한다'는 가불기였다. 

주식시장 개장에 맞춰 출근하는 30대 초반 대표는 본인이 그래프를 볼 때 말을 거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누군가 그런 상황을 만들면 '수평적'인 스타트업답게 모든 직원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한 뒤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혼내곤 했다.(유교사상이 가득한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그런 상황은 땡복의 계획에 없었기에 일단 대표가 출근하기 10분 전, 주임을 불렀다.


"저 주임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네 땡복씨, 말씀하세요"

"아 여기선 좀 그렇고 저기 방으로..."


사무실 안 작은 방으로 들어온 난 주임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주임님, 집 안에 큰일이 생겨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니 땡복씨, 적응 잘하고 있었잖아요. 잠시 휴가 내고 갔다 오면 안 될 일이에요?"


그렇다. 땡복은 회사에선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있었고, 회사 사람들은 모두 땡복이 여기서 2년 안에 연봉 2배를 받는 야망을 가진채 신나게 일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말문은 열었으나 '큰일의 정체'를 준비 안 한 땡복은 당황해 버렸다. 일단 생각나는 게 '아버지 사업'이었는데, 그 순간 머리가 하얘진 땡복은 "아버지께 가보려구요"라는 원초적인 한국어를 구사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땡복의 말에 당황한 주임,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온 대답은 땡복의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저 땡복씨, 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일보다 중요한 게 있죠. 얼른 가 보셔야겠네요. 대표님껜 제가 잘 얘기하겠습니다. 같이 일해서 좋았는데 아쉽네요"


땡복은 뇌정지가 왔다. '뭐지?'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 지금 주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여기서 잠시, 땡복은 당황하면 얼굴과 귀가 빨개지는 습관이 있다(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아내에게 바로 들킨다). 그리고 안구 건조증이 있어 조금만 눈이 건조해도 눈물이 맺힌다.

한 겨울, 좁은 사무실 안엔 히터가 펑펑 틀어져 있었고 주임은 귀가 빨개지고 눈물이 살짝 맺힌 땡복의 말을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로 들은 것이다. 


한순간에 불효자가 된 땡복. 그러나 그때의 난 그 순간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리고 사람들을 속여먹는 이 회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탈출해야 했기에 주임의 오해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5분 뒤, 대표가 출근하자 주임은 부리나케 대표에게 가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드디어 성사된 대표와의 면담.


"땡복씨, 아버지가 아프시다고요? 땡복씨 경남 출신이죠?"

어느새 우리 아버지는 아프신 분이 되어 있었다.

"저 집에 일이 생겨서... 이래 저래 제가 장남이라 가봐야 할 것 같아요"


5초간의 정적. 그리곤 엄지와 검지로 턱을 받친 대표가 입을 뗐다.

"그럼 가 봐야죠. 오후까지 인수인계 자료 간단히 써놓고 오늘까지만 일하는 걸로 하세요"


'어? 이렇게 쉽게?'

난 퇴사가 이리 쉬운 줄은 몰랐다. 물론 기존 회사의 퇴사 방식은 더 복잡하리라.

그러나 원하는 바를 얻어낸 그 순간의 땡복은 너무 쉽게 흘러가버린 일에 멍해져 말문을 잃었다.




땡복은 오후 내내 멍한 표정으로 인수인계 자료를 작성했다. 말이 인수인계지, 수습을 떼지 않고 일을 배운 적도 없는 땡복이 적을만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또, 사람들은 내 멍한 표정을 슬픔으로 착각했는지 하루종일 말을 걸지 않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렇게 사무실이 적막해지자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들. 모니터 4대에 카톡창 몇십 개를 띄워놓고 한 명을 속이는 광경, 여기에 맞춰 있지도 않은 '다국적 주식 전문가 정보요원'을 연기하는 대표, 여전히 갖가지 낯 뜨거운 방식으로 몇 살인지도 모르는 대표를 찬양하는 사람들까지. 


일한 만큼의 급여를 최저임금으로 쳐서 정산해 주겠단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6시가 되자 난 설렘 가득 안고 들어간 그 건물에서 10일간의 작은 지옥을 경험하고 나왔다.

그렇게 집에 가는 길, 내일 먹을 양식과 친구에게 줄 집세가 없었음에도 땡복은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면 이걸 '평안'이라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의 한 구절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꽃이 이뻐지면 나이 든 거라던데, 요즘 따라 이쁘다. 그리고 얜 코스모스다.

아, 하늘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걱정 없이 잘 살거늘. 심지어 아스팔트에 드러누운 길고양이도 내가 준 츄르에 행복해하지 않는가.

그래. 이제 난 직업이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내일을 어떻게 살지 모르는 길고양이와 땡복, 그대들에게 평안 있으라.

작가의 이전글 2300억원의 스타트업을 차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