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월 May 08. 2024

지금도, 그 시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입대 위로 술자리

몇 없는 대학 친구와 더욱 몇 안 되는 후배까지 셋이서 하게 된, 정말 오랜만의 술자리다.

집에서 읽고 쓰며 지냈더니 간도 깨끗해진 것인지.

입에 들어오는 차가운 소주는 너무도 달았고 위장에 흘러내려가자마자 취기가 퍼지며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친구는 높은 친화력 덕분에 온갖 군대 이야기들을 들어뒀던지라 어지간한 군필자만큼 잘 알고 있어 신나게 조언의 껍데기를 쓴 겁주기용 군대 이야기를 했다.


훈련소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난 다음 아침에 느끼는 이세계에 온 듯한 혼돈부터 온갖 고통스러운 훈련들,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비법들. 나아가 부대 배치를 받고 나서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담배에 정신병까지 얻어온 참 거지 같았고 징글징글했던 군생활이었는데, 몇 없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간신히 끝내고 돌아올 수 있었던 군생활이었는데 아끼던 후배에게 반쯤 놀려주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으니 별 거 아니었던, 누구나 다 겪는 일들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힘든 일을 속에 품으면 푹 삭아서 독이 되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하면 정말 별 거 아닌 일인 듯 가벼워진다는 것일까. 정말 아픈 기억은 똑같이 일어날 일말의 가능성도 없었기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은 가벼워졌다. 앞이 보이긴커녕 수압에 찌그러져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는 바닷속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게 그 위로 1m 정도는 떠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숨을 고르고, 생각을 거르는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며 친구가 지나가듯 이야기한다.


"얘만큼 군대 잘 갔다 온 사람 못 봤어."


군대에서 몸무게를 20킬로 너머 빼도록 운동도 하고, 그 안에서 읽고 나온 책도 세 자릿수에, 거기서 글을 읽던 걸 살려 지금 돈까지 벌고 있으니. 여하튼 속 뜻은 군대에서의 경험이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인 결과로 이끌어줬다는 것이겠지.


듣고 나니 타인이 내 행보를 지켜봐 준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속으로까지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며 속에서 잊혔던 커다란 돌 하나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그때의 시간은 그토록 가치 있어야만 한다. 얼마나 거지 같은 경험들을 하고, 그런 일들을 또 마주할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고자 얼마나 발악을 했는데. 내가 지워지고 나서야 '나'의 소중함을 느꼈고, 시간을 내다 버리게 되고 나서야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가치가 와닿게 되었었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울듯한 스트레스와 잠시라고 힘을 풀면 짖뭉게질 것 같아서 얼마나 단단하게 힘을 주고 긴장하며 지냈는가. 그리고 지금과 그때가 뭐가 다르다고 이렇게 늘어져 형체를 잃어가고 있는가. 뭘 했다고 벌써 뭐라도 된 거 마냥 이러고 있는가.


즐기기 위해 시간을 태우러 나온 자리에서, 내가 여태 시간을 태워먹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시정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