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악마를 데려와 보여주면 끝이지만,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 어딘가에 아직 악마가 숨어있어 증명하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증명은 중세 유럽에서 사용된 법적 용어로, 어떠한 사실이나 인과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입증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 생각은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서 사람들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더욱 세세하게 분석하게 되었다.
신을 믿으라 말하는 누군가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가져와라.'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세상을 만든 신에 대한 증거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라는 식의 말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시각이 생겼고, 이는 곧 사람이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되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장점보다 훨씬 큰 부정적인 변화도 동시에 끌어냈다. 바로 '불신'이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근거가 충분한지를 따질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주변에서 신뢰하기 부족한 수많은 것들을 찾아냈다. 온갖 미신부터 신의 선택을 받거나 혈통을 통해 이어진 다른 인간들보다 고귀한 왕과 귀족, 일상에 무수히 녹아들어 있는 사상들까지. 주변에 온통 그동안은 철석같이 믿었지만 생각해 보니 존재를,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기엔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점차 자신의 세상을 이루던 모든 것이 믿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믿음이 무너졌고, 믿음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종교와 왕권은 쇠퇴하게 되었지만, 그것에 대해 '틀렸다'는 입장까지 갖게 되는 건 비합리적인 판단이고 이러한 판단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탓에 생겨난다.
문제는 인간의 효율을 찾으려는 습성, 다르게 말하면 나태함이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하면 급격히 피곤해지고 짜증이 나듯이, 어떤 이야기에 대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알 수 없다. 옳을 수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따위의 대답은 무의식적으로 꺼려진다. 그렇기에 제 생각이건 타인이 하는 이야기건 확실한 옳고 그름, 선악의 구별을 내리려 한다. 그것이 어느 쪽을 택하던 이성적이지 않은 선택이더라도 말이다. 이는 수학처럼 명확히 답이 내려지지 않는 개인적인 고민부터 과학적으로 아직 규정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부분과 연관된 문제. 예를 들어, 육체적인 젠더와 정신적인 젠더가 어긋난다는 등의 주장에서 극대화된다.
가까운 지인이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별이라는 말을 한다면 어떨까? 이성적인 생각이라면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들어보려 할 것이다. 왜 그간 알고 있던 성별이 아니라 다른 성별이라 생각한 것일까? 어떤 경험을 통해,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일까? 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에게 명확히 보여주거나 절대다수의 사람에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유전자 속 성염색체가 여성의 XX 염색체나 남성의 XY 염색체가 아닌 XZ 염색체로 나타나거나, 남성의 남근과 음낭, 여성의 질과 자궁 모두와 전혀 다른 제3 성별의 신체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는 것처럼 '증명'이 안되는 근거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헛소리라거나 상대 보고 자신의 육체적 성별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회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옳다'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아니 그럼 뭐 어쩌라고? 라고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나도 알고 있으니, 여기까지 읽은 김에 조금만 더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실용적인 마음가짐은 근거 없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무시하되, 고려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제시된다면 잠정적으로 주장을 수용하고 그것이 정말 타당성 있는 근거인지 검증하는 열린 자세일 것이다. ]
- 이한소 저, 선택된 윤리 중에서
중요한 건 '수용하기에 충분한 근거인가?'라고 직접 판단해 보는 노력과 충분한 근거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잠정적인 수용이다. '그렇다'도 아니고 '아니다'도 아닌 '그럴지도 모르겠다'이다. 흑백논리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회색 지대를 충분히 열어놓는 것이다. 수용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현대에는 온갖 토론 거리, 혹은 싸움거리가 터져 나온다. 젠더와 성 소수자, 정치 성향, 비트코인의 정당성, 성공론으로 성공한 성공론자, 국뽕(국수주의), 세대 갈등, SNS의 문제성, 영상물로 인한 문해력 문제 등등…. 당장 글을 쓰며 앉은 자리에서 몇 초 동안 스쳐 지나간 싸움거리만 해도 이 정도인데 모든 이슈와 논란을 끌어모으면 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나올 것이다. 저마다 이런 이슈에 대해 어느 쪽이 옳은지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공통으로 어찌 되었든 한쪽의 확실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에 싸울 수 있는 정도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이다. 네 말이 맞니, 내 말이 맞니 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를, 자기 삶 동안 끝나지 않을 싸움을.
인터넷상에 '중립 기어'라는 좋은 말이 있다. 어느 편으로 서지 않고 이슈를 더 지켜보며 생각하고 판단하겠다는 말이다.
다들 어느 편인지부터 갈라놓고 물어뜯으며 싸울 게 아니라, 한걸음 물러서서 모두를 들어볼 수 있는 열린 자세가 당장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