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 한 장의 여행.

언젠가 그곳에 가 닿으면 이 모습도 꼭 전해줘.

by 윤모닝





제주 그린 밀크티도 달래지 못한

울산의 뜨거운 여름.


탈수가 걱정된 나머지

허겁지겁 들린 공원 안 편의점.

그렇게 생수 한 병과 맞바꾼

카드 지갑 속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



그러고보니

넌 어느 손을 타고 왔을까.


자갈치 시장에서 파닥파닥 날뛰는 생선을 만지는 아주머니의 손?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 입에 털어 넣고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아저씨의 손?

뭔지도 모르고 한 세배도 이쁘다며 세뱃돈 쥐어주던 둘째 숙모의 손?

막대사탕 입에 물고서 씽씽이 타고 바람개비처럼 힘차게 내달리는 꼬마의 손?

그럼 혹시,


밀레니엄 시절,

그래, 디지털로 막 물들어가던 때,

이른 새벽부터 이태원 시장에 자리 잡고 앉아

손수 만든 앞치마를 좌판에 펼쳐놓고 팔았다던 순남 씨 못 봤니?


딸기셰이크가 먹고 싶다던 손녀를 위해

쓸 줄도 모르던 믹서기를 만지다가

차가운 칼날에 손가락을 베이고도

셰이크를 갈아주던 순남 씨는 못 봤니?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던 아홉 살.

굶주리고 있을 부산 손주들이 걱정돼,

손바닥 만한 배낭 들쳐메고

기약도 보수도 없는,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은 바람막이를 자처하며

망설임 없이 고속버스 타고 내려오던,


그런 할미를

현관문 담벼락 빨간 벽돌에 숨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어린 꼬마.

그 빨간 꼬마에겐 유일하게 할머니였던,

김순남 씨. 넌 본 적없니?



있잖아, 지금이 아니어도

혹시나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면

지금 내 모습 담은 이 사진이랑

같이 전해줄래?



온 세상이 하얗고 푸를 것만 같은

거기선 잘 지내는지.


오늘 같은 한여름이면 믹서기에 간 딸기셰이크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 구슬 같던 꼬마는 이렇게 잘 커있다고.

찬바람 숭숭 부는 살얼음 같은 집에서도

늘 뜸 들여진 밥솥처럼

내 굶주림을 걱정하던 할미의 손을 타고

꼬마는 이렇게 잘 커왔다고.


그리고 이젠 할미의 최애 음식이라며 자주 해주던

된장 잡탕밥 세 그릇까지 먹을 수 있다고.

왠만한 할머니 환자들 케어해 봐서

이젠 내가 할미의 숨긴 눈물까지도 속속들이 잘 돌봐줄 수 있다고.


세월에 흐려진 기억으로

내 이름 잘못 불러도 이젠

놀라지도 않고 섭섭해하지도 않을 테니까

내 얼굴에 스치는 지금의 여름 바람으로라도 와달라고.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 꼬마의 사전에 할머니는

신봉식씨의 아내,

37년생 김순남 씨 밖에 없다고.

너무 보고 싶다고,

지금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