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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집사 Jan 14. 2023

지금 너무 예쁜 나이

나이에 대한 고찰

대학생 시절에 난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인턴을 했었다. 그때 내 사수로 계셨던 전문위원 선생님은 판교에 거주하셨는데 아직까지 둘 다 이사를 안 가고 여전히 동네가 가까워 매년 최소 1번씩은 꼭 나를 불러내 얼굴을 보고자 하신다.


너무 감사하지. 보통은 이런 안부인사를 아랫사람이 먼저 건네고 해야 하는데 이건 뭐 매번 순서가 거꾸로다. 타고난 성격상 아부소리도, 입 바른 소리도 못 하는지라 소소하게 "잘 지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도 좀처럼 쉽게 못 건넨다. 아니, 생각 자체를 못 한다. 바쁘단 핑계로, 어쩌면 늘 받아 버릇만 해와서 여전히 나는 부족하다.




대사관 면접 보던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나운 호랑이 기운이 잔뜩 느껴지는 카리스마 뿜뿜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다른 대사관 직원들도 앉아계셨다. 안 그런 척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긴장을 하고 들어갔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아 면접이 끝났다. 당시 그룹면접이었는데 나한테는 2가지 정도의 기본 질문 밖에 물어보지 않으셨다. 떨어졌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합격이었다.


인턴이 되고도 선생님은 나한테 딱히 일을 주지 않으셨다. 한 2주간 이렇다 할 일 없이 나는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은 나한테 출퇴근을 같이 하자는 뜬금없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집이 판교고 너는 집이 분당 서현이니 가깝지 않냐며 같이 택시를 타자고 말씀하셨다. 출근길에 한남동을 지나가는데 꼭 큰길가에 있는 이디야에 들려서 바닐라라떼를 사야 했다. 선생님이 매번 택시 안에서 핸드폰으로 업무를 보며 바쁘시니 눈치껏 이디야에 뛰어들어갔다 오는 건 내 몫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인턴이 끝나가던 시점에, 같이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 혹시 저 면접날 기억 나시냐고, 전 그때 면접이 5분도 안 걸려서 떨어진 줄 알았는데 왜 뽑으신 거예요?


"그냥 마음에 들었어. 더 물어볼 것도 없었지"


그런데 왜 초반에 저한테 일을 안 주셨어요?


"그냥 지켜본 거지. 근데 보통은 일을 안 주고 있으면 다들 그걸 못 견디고 먼저 찾아와서 일을 달라, 도와드릴 게 없냐 물어보는데 넌 그런 게 없더라. 바빠죽겠는데 나를 귀찮게 안 해서 좋았어. 그렇다고 애가 딴짓하는 것도 아니고 자리를 비우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가 다른 인턴들과 수다 떨면서 엄청 크게 웃는데 난 네 웃음소리가 듣기 좋더라. 넌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호탕하게 웃잖아."




선생님은 날 무척 예뻐하고 아껴주셨다. 본인 주위의 좋은 인맥, 내 또래 친구들을 자꾸 연결시켜 주려고 틈만 나면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이리저리 소개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광화문으로 나와라, 종로로 나와라 등등.. 인턴이 종료되고도, 선생님은 대사관이 주최하는 각종 전시회의 티켓을 꼭 2장씩 따로 챙겨주셨다. 내가 대학교에 행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는 어느 날 전화를 하셔서 "ㅇㅇ야, 조만간 어떤 여자애가 너한테 전화할 거야.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인턴인데 걔가 연세대 출신인데 학교에서 근무생활이 궁금한가 보더라. 그래서 네 얘기를 좀 했다. 선배로서 조언 좀 부탁해."




"선생님 매번 죄송해요. 시간 날 때 한번 보자는 소리를 매번 선생님이 저한테 하시고. 그런 인사를 제가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참 그게 어려워요."


작년에 딱 이맘때쯤 선생님과 오랜만에 판교에서 만났었다.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배실배실 웃으면서 말하는 내게 선생님은 별 시답지 않은 말을 한다는 듯


"당연히 내가 해야지. 지금 너는 제일 바쁠 때야. 딱 네 나이대 애들이 지금 제일 바쁘게 정신없이 지낼 때잖아. 원래 그래. 원래 잘 생각 못해. 바쁜데 어떻게 그런 사사로운 걸 챙길 정신이 있겠니."


저 인턴할 때, 선생님이 저한테 해주셨던 진짜 좋은 말이 있는데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게 있거든요? 그때도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해주신 말인데.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 말이 있다.




"ㅇㅇ야, 너가 지금 몇 살이지?"


"23살이요."


"참 예쁜 나이다. 그런데 너가 27살이 되어도, 28살이 되어도 난 참 예쁜 나이라고 생각할 거야. 30살이 되어도, 31살이 되어도 참 예쁜 나이일 거고. 나이는 마음먹기 나름인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시간이 흘러 너가 몇 살이 되더라도 참 예쁜 나이일 거야."




나는 이 말을 선생님 앞에서 똑같이 되뇌면서 코 끝이 조금 찡했다. 선생님은 자기가 그런 말도 했냐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인턴이 끝난지도 10년이 지나 어느덧 나는 30대가, 선생님은 40대가 됐다. 자유영혼 선생님은 아직 싱글에 멋진 커리어우먼이다.


아직도 일을 그렇게 빡세게 하세요? 선생님 너무 바쁘시잖아요, 하면 선생님은 이제 8시 출근이면 7시 58분까지 밖에 있다가 겨우 느릿느릿 사무실 들어간다며 일하기 지겹다며 한껏 풀어진 도 보여주신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모습. 이젠 커리어와 직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서로의 연애와 남자 얘기를 서슴없이 나누는 더 편한 사이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냥, 오늘은... 올해부터 만 나이로 통일된 게 너무 좋다고 오랜만에 쌉소리 적어보는 브런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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