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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민 Feb 01. 2022

국가고시가 끝났다

손을 떨면서 채점했다


사람이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 마음이 다르다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후기를 꼭 쓰겠노라 다짐한 것과 달리 시험이 끝난 3주가 지난 후에야 글을 쓰게 되었다. 한동안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고 이제야 일상으로 복귀한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정말로 잊히기 전에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시험 전 날에는 이상하게 밤 열한 시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 긴장하면 되려 잠이 왔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뇌가 진정 좀 하라고 몸을 재워버리는 걸까. 그래서 받아들이고 잠을 청했다. 악몽을 어지럽게 꿨지만 그래도 충분히 누워있긴 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시험 전날에 잠이 안 오면 밤새 공부라도 해야 하나 걱정을 했으니까.


이렇게 덤덤하게 쓰고 있지만 그 전날까지도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고 느낀 탓에 굉장히 불안했다. 약 3주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독서실에 갔었음에고 불구하고… 남들은 초반에 열심히 공부하고 후반에 좀 쉬면서 공부를 하는 것 같던데 나는 반대로 후반에 몰아서 열심히 해야 했다. 지금은 또 기억 조작이 되어서 국가고시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지만 분명히 그전까지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재고 또 재면서 최악을 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사실은 그게 별 것이 아니었다 - 하고 치부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 더 기억하려고 한다. 생각해보니까 정말로 이제는 신경 써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젊은 꼰대가 되지 않아야지.


일단, 본가에 돌아와 본가 근처에서 시험을 본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 보통은 동기들과 한꺼번에 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의 시험장에 가서 응시를 하는데, 나는 시험이 끝난 후에 허무하게 자취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고 싶지 않았다. 시험 전에 아무래도 가족들과의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했다. 식사를 할 때, 독서실에 가기 전에, 잠에 들기 전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고 안아줄 사람이 있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되니까. 그리고 또 사실 시험장에서 차라리 다 모르는 사람이길 바랐다. 평소에 동기들이 시험기간에 답 맞혀보고 난이도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걸 듣는 것이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이건 이 대학에 와서 좀 놀란 점이었다. 나는 여고를 다니다가 여대를 잠깐 다녔었는데 한 번도 시험 기간에 서로 성적이 어쩌니 그 답이 그게 맞니 틀렸니 하는 대화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들 답 나오기 전까지는 피차 모르는 입장인데 하하. 결과적으로는 난이도와 관계없이 단순하게 내 페이스대로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집에 간 건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저녁엔 점심에 미처 다 먹지 못한 도시락을 먹으면서 답안지가 뜨기를 기다렸다. 손을 덜덜 떨면서 채점했는데 생각보다 잘 본 과목도 있었고 예상외로 많이 틀려 혹시 평락은 아닐까 하는 과목도 있었다. 본초학은 마지막까지 좀 버려놓은 감이 있었는데 본과 1, 2학년 때의 기억으로 비비고 비벼서 나름 잘 봤고... 부인과학은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보지 못했다. 안이비후과와 피부과는 사진과 연결 지어서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의외의 고득점을 했고. 소아과 전문의를 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소아과는 푸는 내내 내가 무슨 공부를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넉넉한 점수로 통과했다. (사실 지금도 괜히 마킹은 잘한 건지 수험번호는 잘 쓴 건지 가끔 생각하곤 한다) 병원 지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고득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한 거겠지.


이 시험은 그냥 마침표일 뿐이다. 문장의 완성도는 마침표를 얼마나 잘 찍느냐가 아니라 마침표 이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20대의 6년은 겁이 날 정도로 값지고 소중했다. 과장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장 젊고 건강한 나날을 의미 없이 흘려보낸 건 아닌지 하는 걱정에 덜컥 겁이 나곤 했다. 뭐 어느 정도는 맞겠고 어느 정도는 또 과장이 맞다. 주변의 30대를 갓 맞이한 언니들을 보게 되니까 이제 겁은 안 난다. 오히려 더 좋아보이던데. 너무나도 진부한 이야기지만, 한 문장의 마침표를 찍어야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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